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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 Aug 16. 2023

31가지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내가 이런(?) 사람이 된 데에는 아무래도 가풍이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먹는 데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매일 식탁에 소고기나 전복이 올라왔다는 말은 아니긴 한데 하여간에 어릴 적부터 참 잘 먹이고 잘 먹었다. 엄마는 당신이 나를 굶긴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먹는 데 집착하냐 타박하면서도 내 입에 김에 싼 따끈한 밥을 밀어넣었고, 나는 허둥지둥 교복을 입으면서도 군말 없이 그것을 열심히 받아먹었다.  



그런 옛날 추억을 되짚다보면 한 끝에서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아이스크림 프랜차이즈이다. 31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그 아이스크림 가게는 마치 피자가게가 그렇듯이 지금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가게였다. 거기서 일주일에 한 번씩 패밀리 사이즈의 아이스크림을 사먹는다는 것은 약간 우쭐한 일이었다. 어느 집은 검소하게 사느라 내 또래인 그 집 아이들이 중학생이 될때까지도 그 가게의 아이스크림을 먹어본 적이 없더라는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네댓개의 종류를 담을 수 있는 사이즈를 고른다고 해도 절반은 아빠가 좋아하는 호두맛을 넣는 것이 오래된 악습이었기 때문에, 남은 절반에 무엇을 넣을지가 중요했다. 한동안은 입안에서 사탕이 톡톡 튀는 파란 아이스크림에 끌렸지만 금새 질리고는 그 뒤 꽤 오랫동안 무지개색 셔벗과 딸기 아이스크림을 꼭 골랐다. 그 두 개는 가족 모두가 동의하는 선택이기도 했다. 셔벗은 뒷맛이 상큼한 게 좋았고, 딸기 아이스크림은 중간에 간간이 박힌 딸기 과육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가끔씩 그 딸기만 살살 긁어내 파먹는 야비한 짓도 했다. 그러고 남은 한 가지 맛으로는 가끔 동생을 위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대부분 나를 위한 치즈케이크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가게에서는 아이스크림과 함께 앙증맞은 분홍색 플라스틱 숟가락을 사람 수대로 챙겨서 동봉해주었지만, 아이스크림을 힘주어 퍼내다가 몇번 그 알량한 크기의 도구를 부러뜨리고 나서부터 우리는 쇠로 된 단단한 밥숟가락을 하나씩 들고 아이스크림 앞에 둘러앉고는 했다. 밥먹을 때보다 더 힘을 주어 단단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으면 즐거웠다. 세 개의 숟가락이 서로 질세라 바쁘게 아이스크림 통을 들락날락거렸고, 하나는 됐다며 손사레를 쳤다. 예전에는 여러가지 맛을 고르면 처음 고른 것이 제일 아래에, 마지막에 고른것이 제일 위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맛을 파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으레 마지막에 고른 맛을 무게를 맞추기 위해 조금씩 더 넣어주었으므로 아빠의 호두맛 아이스크림을 마지막에 주문하는 요령이 필요하기도 했다.


전쟁같이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우고 나면 남은 드라이아이스가 싱크대에서 굴러다녔다. 나는 과학 실험을 떠올리게 하는 그 연기가 좋아서 몇번이고 수도물을 틀어대다가 물낭비하지 말라며 가볍게 꾸중을 듣고는 했다.



그렇게 가족끼리의 의식이었던 아이스크림 가게는 사춘기를 지나 또 한 번 크게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건 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퐁듀가 출시되었을 때이다.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가운데 따끈하게 녹인 초콜릿을 둘러싸고 알록달록 온갖 아이스크림이 탁구공같이 쌓여있었고 서운할세라 생과일 조각과 미니 스펀지빵도 살뜰히 곁들어져 있었다. 그 포스터를 가게 유리벽에서 본 이후부터 나는 앓았다. 그렇지만 퐁듀는 동네 작은 지점에서는 팔지도 않았다. 번화가의 큰 지점에서만 판매를 하고 있었다. 간다고 해도 문제였다. 당연히도, 퐁듀는 그당시 굉장히 고가였다. 대략 만원초반대의 가격으로 기억하는데, 십여년전의 만원은 지금의 만원과 완전히 다른 돈인지라 쉬이 시도가 어려웠다. 나와 같이 쇠숟가락을 들던 가족들이라면 모를까 친구들에게 그 돈을 쓰자고 하기에는 계기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다 어느 중간고사인가 기말고사가 끝나고, 친구 넷이서 드디어 번화가로 놀러나갈 일이 생겼다. 버스를 타면서부터 이미 내 마음은 어떻게 나머지 셋을 설득해서 오늘이야말로 그 퐁듀를 먹을 수 있을까, 그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자연스럽게 가게 앞을 지나가며, 들어가서 아이스크림을 먹자, 여기 아이스크림 퐁듀라는 메뉴가 있네, 이거 한 번 먹어볼까, 비싸긴 한데 오늘 시험도 끝났으니까, 이거 잘 안 팔 걸? 열심히도 주저하는 아이들을 설득했다.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어쨌든 내 설득은 먹혔던 것 같다. 아이들이 삼천원씩 돈을 꺼낼 때, 나는 제발 맛있어라, 제발 괜찮아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교복을 입은 채, 어른스럽고 세련된 언니 오빠들이 즐비한 번화가 지점에서 기어코 나는 그 퐁듀를 내 앞에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흥분과 걱정이 두서 없이 튀어올랐다. 메뉴를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더 그랬다. 퐁듀에는 패밀리 사이즈를 주문해도 몇개밖에 못 골랐던 아이스크림이 잔뜩 있었다. 탁구공 같은 아이스크림 알을 뜨거운 초콜릿 퐁듀에 담그자 초콜릿이 금새 아이스크림을 부드럽게 코팅했다. 맛있었다. 당연히도 맛이 있었다.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정말 초콜릿과 아이스크림의 맛,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맛있긴 한데 비싸다.."

친구 하나가 애매하게 웃었다. 내 마음이 나도 나도, 하며 힘차게 손을 흔들었지만 애써 못 본 체 했다. 그래? 난 맛있는데. 애써 말했다. 메뉴가 단 것투성이인데도 어쩐지 입이 썼다.



그 서른 한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먹은 지 한참 되긴 했지만 가끔 먹어도 여전히 예전처럼 맛있다. 아무렴 달디단 설탕과 부드러운 지방이 새삼 맛없을 이유가 하등 없다. 그렇지만 더이상 아이스크림 통을 손목 아프게 파는 일도 없고 딸기맛 아이스크림의 냉동 딸기를 몰래 긁어먹을 일도 없다. 그런 구찬스러운 일을 벌이기엔 맛있는 걸 너무 많이 먹었다. 그것보다는 가벼운 맛에 원재료의 맛이 신선하게 살아있는 젤라또를 사먹거나 유지방이 적은 다이어트용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먹고 싶은 만큼, 내 돈을 주고.

그런 게 재미없는 어른인가보다. 어떤 맛을 고를지 다투고, 질세라 숟가락질하며 아이스크림을 퍼내고, 새로운 메뉴를 몰래 욕심부리다가 몰래 실망하는, 그런 짜릿한 걸 하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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