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D홀더의 프리랜서 지식인 도전기
아차 싶었던 것은 박사과정 3년차,
학자의 길은 분명 내 길인줄로 믿고 달려온지 근 10년차쯤이었다.
수많은 상황적 요소가 작용했지만, 내 잘못이 없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다. 박사 3년차가 되서야 이 길은 내 길이 될 수 없음을 현실직시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훨씬 이전부터 결정했어야 할 내용이었다. 이미 부서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최면과 자기위로로 회피하고 있었을수도.
당연히 박사 과정을 그만두려 한다는 나의 말에 가족들은 입을 모아 반대했다. 여태까지 이루어 놓은 것이 아깝지 않느냐, 어찌되었든 끝은 내야 한다, 와 같은 예상된 반응들이었다. 유종의 미를 거둬야한다, 는 수도 없이 들어왔던 말. 박사과정을 박차고 나가도 사실 답은 없었고, 박사과정을 받는다 한들 또 답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유종의 미를 택했다. 도중하차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왕 시작한거 끝은 내자. 이왕 들어온 거 논문까지는 출판하자. 그리고 학계를 떠나자.
남은 코스웍과 논문 과정을 끝내니 깔끔하게 5년으로 내 박사과정은 종결되었다. 전공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전공과 아예 상관없는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이력서에 박사 이력을 써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으나 결국엔 포함시켰다. 면접에서는 박사학위가 아깝지 않냐는 질문을 들었다. 언젠가 풀어낼 수 있을까, 나는 더이상 이 전공과 나의 박사이력에 관련한 직업을 갖고 싶지 않았으며, 그저 소박한 직장을 잡고 내 삶을 다시 시작하길 원했다. 박사라는 그릇에 담겨있던 나의 꿈, 나의 삶, 나의 정체성을 하루 빨리 다른 그릇에 옮겨주고 싶었다.
다행히 미국이란 땅은 기회의 땅이 맞았다.
공부만 할 줄 알았지, 학교 외엔 아무 직업적 경력도 없던 나를 받아주는 직장이 생겼고, 벌이도 많지는 않았지만 적지도 않았다. 남편과 딸과 함께 소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직장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로 끝나고 싶진 않았다.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는 주류 학자는 아닐지라도, 나는 남이 정해준 주제가 아닌 내가 원하는 주제를, 논문이 아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정해진 연구방법이 아닌 자유로운 관찰을 하는 비주류 아웃사이더 연구자가 되고 싶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하고 글을 쓰다 보면 공감하는 사람 몇 명만 만나도 행복할 것이다.
오랜만에 휴대폰 메모장을 뒤지다 몇년 전 스크랩해 놓은 기사를 발견했다. 공병호씨에 대한 기사였다. 지금은 널리 알려진 퍼스널브랜딩이라지만, 이미 퍼스널브랜딩이 유행하기도 전부터 몇십년 전에 공병호 연구소의 공병호 소장은 자기 자신을 브랜딩하여 1인 연구소를 창립하고 자기 자신을 대중을 위한 비주류 학자이자 지식을 파는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그 때 당시의 문화와 인식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십년도 전에 쓰여진 이 기사를 읽고 눈이 반짝였던 순간, 그리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 기사를 스크랩한 그 순간이 기억났다. 세상에는 정해진 길,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자기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눈이 반짝이고 마음이 설레이는 이유는 저 유명한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인간 본연의 호기심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나는 늘 대다수가 가는 길을 요리조리 피해서 다녔던 것 같다. 재수를 할 땐 대다수의 재수하던 친구들이 택했던 유명한 재수학원을 가지않고 집에서 1년간 독학재수를 했다. 이듬해 입학한 사범대에서 동기들이 모두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 나는 유학을 꿈꿨다. 석사를 따고 나선, 통상 이 전공의 사람들이 가는 다음 코스를 따르지 않고 지금의 박사 전공을 택했다. 박사를 졸업하고 나선, (본의 아닌 상황적 이유로 인한 복잡한 선택이었지만) 전공과 전혀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어찌보면 "이래서 네 인생이 요 모양 요 꼴이지" 라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내면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모두 나름의 정당한 이유와 신념을 따라온 선택이었기에 단 1그램의 후회도 없다. 남이 볼 땐 뒤죽박죽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 재미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PhD 홀더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일을 하며 이제는 프리랜서 지식인이라는 삶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향해 이제 막 첫 걸음을 떼려고 한다. 박사 타이틀 보유자로서 새로운 직장의 엔트리로 들어간다는게 낯설고 두렵기도 하다. 박사 타이틀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박사를 따기까지의 나의 시간과 노력이 쏟아진 그 무게 자체 때문에, 내가 이렇게 가볍게 다른 선택을 해도 되나, 싶은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공들였던 탑, 헌신을 다했던 일들, 시간과 정성을 쏟았던 그 무언가에게 이제는 안녕을 고해야 할 것 같아 잠 못드는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나에게도, 언젠가 담담히 말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게 지나고 보면, 우리가 쏟았던 그 시간들이 그냥 버려진 허송세월과 낭비가 아니라, 그 다음 운명을 향한 발돋움이었다고. 우리가 쏟았던 그 노력의 무게가 그 다음 운명을 있게 한 이유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