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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비아 Apr 30. 2024

82년생 김지영은 왜 불행했는가

공유가 잘못했네



2019년에 개봉된 영화 [82년생 김지영] 을 남편과 함께 보고난 뒤의 이야기다.


왜 김지영은 불행했는가? 사회구조인가? 여성이라는 게 문제인가 아니면 그녀 개인의 문제인가?

주인공 82년생 김지영이 여성으로서 살아오고 결혼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점점 현실의 벽을 깨달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다 나중엔 김지영 (정유미 배우)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며 남편 (공유 배우)이 “니가 가끔 다른사람이 돼” 하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각설하고, 그당시 두살배기를 키우고 있던 나는 일단 개인적으로 김지영의 상황이 무척 공감이 됐다. 김지영이 느끼는 그런 감정들, 경험들, 전부는 아니지만 여자로서 살아오면서 일부 경험해보고 느끼고 공감이 되는부분들이 많았다. 꿈많은 소녀였고, 살면서 받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시선과 오해, 결혼과 육아를 통해 느낀 것들…


그러나 가만히 내 내면의 파동을 살펴봤을때 개인적으로 느꼈던 것들이 있었다. 그중 한가지는

사회가 미디어를 통해 생각을 조장한다.

미디어, 뉴스, 책, 등등 사회와 문화가 여성을 피해자인것처럼 몰아가고, 느낌마저도 조장할 수 있다. 사람은 듣는것, 보는것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특히 사람은 듣는대로 믿는 존재다. 본능이 그렇다.


누가 나에게 “야, 누구누구 말이야, 완전 나쁜놈이래~!” 하면  완전 중립적으로 AI처럼 정보 분석하고 합리적으로 추론해서 그사람이 나쁜놈인지 아닌지 가리는게 아니라 일단 의심이 간다. 중립기어 박고도 반신반의 하면서 일단 그사람을 볼때 순수한 눈으로 보는게 어렵다.


마찬가지로 사회 곳곳에서, 특히 미디어를 통해서 특정 생각을 조장하는 것은 문제다.

여성들로 하여금, 야, 쟤도 억울하고, 얘도 억울한데, 넌 안억울하냐? 너도 사람인데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너의 처우가 남자보다 못한것도 못느끼니? 문제의식이 없어? 하면서 조장을 하는게 문제다. 이걸 계속 미디어에서 보고 듣노라면, 가만히 애기 재우고 설거지 하고 있으면, 떠오른다. 그 생각이..

"나는 억울하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

남편이 막 미워진다.

나란 존재가, 세상 세상 이런 피해자가 없다.


육아하면서 남편 증오하게 되는 사례를 정말 많이 봤다. 주위에 정말 많다. 반면 행복하게 사는 여자들도 많다. 육아와 출산 자체를 셀러브레이트하고 즐기며. 중요한건 방향이다. 나는 끊임없이 불행한 세상에 산다며 불평하는 방향으로 갈지, 이 때뿐인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의 방향으로 나아갈지.


생각이 사로잡히면 불행해진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정신병 걸린다. 일부 페미니스트적인 생각은 여자를 해방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불행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그럼 분명히 이러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기 싫어서 눈감고 귀막고 그러고 살라는거냐?

현실부정 아니냐?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다. 현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육아? 현실이다. 경력단절? 그것도 현실이다. 여성들의 피해당하는거? 그것도 현실이다. 현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눈감고 귀막자는 게 아니다. 다만 무엇에 눈뜨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생각하자 이말이다. 맥락없이 “여성이 피해자다”는 무조건적인 생각을 믿지말자는 말이다.


단연코 불행이 없다면 발전이 없다. 불행하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고, 불편하기 때문에 발명하며 세상은 발전되어왔다. 하지만 나름 무탈하고 행복하게 그 길을 지나왔다 할지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목소리 낼 수 있고, 더 나은 체계를 만들고자 노력할 수 있다. 내가 불편과 불행의 연료가 되어 살라지면 안된다. 내 불편과 불행을 연료삼아 나아가야 한다. 죽지말고 살으라,는 얘기다.  




 내가 불편과 불행의 연료가 되어 살라지면 안된다.
불편과 불행을 연료삼아 나아가야 한다.
죽지말고 살으라,는 얘기다.  



앞서, 김지영의 경험과 느낌에 공감한다고 했다. 나도 “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고, 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가?” “왜 내 일을 하지 못하고 육아를 해야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많이 했다. 생각의 프레임을 완전히 깨버리기 전까지 말이다.


조급하고 협소한 프레임에 갖히면 안된다. 그 프레임에 갖히게 되면 여성은 피해자, 불행한 자가 된다.

특히 미디어가 먹이쳐럼 던져주는 거짓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 먹이를 물고 뜯고 하면서 프레임 싸움에 갇히는 건 더더욱 지양해야 한다.


나는 여성들이 프레임 이상의 가치를 바라보기를 바란다. 무시당해도 차별당해도 굴하지 않는 존재가 되도록 빛이 발하는 방향을 바라보며 걷길 바란다. 많은걸 이뤄낸 여성들은 결코 프레임속에 갖히지 않았다. 오히려 그 프레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어 남녀 모두에게 빛나는 존재가 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장점이 인간의 고유의 고결함과 시너지를 내면 빛날수밖에 없다. 프레임에 갖혀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의 머릿속 프레임 안의 여성이 아니라, 인간이야." 라는 존재가치를 보게끔 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의 머릿속 프레임 안의 여성이 아니라, 인간이야."



여성으로서의 역경과 남성으로서의 역경, 어느것이 더 힘들까?

먼 옛날부터 고결한 여성은 존경을 받았다. 구조적인 차별 속에서도 인간적 고결함을 드러낸 여성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사회 시스템은 조금씩 바뀌어왔다. 여성이 프레임에 갇힌 목소리를 낸다면 프레임과 함께 묻혀버린다. 그러나 프레임을 벗어나 인간 고결함을 살아낼 때,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을때, 그의 빛은 뚜렷해진다.


당연히, 고결한 남성 역시 존경 받는다. 훌륭하지만 프레임안에 갇혀있는 남자는 사회적이고 표면적 인정과 아부는 받을지언정 아내와 자녀들, (특히 여성인) 부하직원들의 인정은 받지못한다. 고결한 남성 역시 프레임을 뛰어넘는 존재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고결하고 싶어 노력하는 존재일지언정. 하지만 그 노력은 더 나은곳으로의 방향성을 의미한다.



내 말을 경청하던 남편은 자기도 할말이 있다며 화제를 전환했다.

공유가 잘못했단다.


공유는 남편으로서 너무 존중이 없다고 했다.

정유미는 계속 사인을 보냈다는 것이다. 일을 하고 싶다고, 자기의 삶이 사라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힘겹다고.

그런데 그 사인을 알아채지 못한건지 알고도 모른척한건지, 정유미가 보낸 사인에 적절하게 반응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유미가 보내는 사인을 존중했더라면, 최소한 육아에 힘겨워하는 것은 알았을테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속터놓고 들어주고, 원하는 대로 갈수있게끔 조금만이라도 도와주었다면.

현실이 무력한 상황이라고 해도 함께 갈수있는 방향만이라도 바라봐 주었으면.

그랬다면 김지영은 그렇게까지 아파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영화 포스터가 마지막엔 정유미가 바라보는 방향을 지긋이 응원하는 눈길로 응원하는 공유의 모습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이 건강한 남편이라야 가능할 것 같은 시나리오이긴 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남편만을 탓하기에는 너무 많은 구조적 어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남편도 아내의 칭찬과 응원을 먹고 살듯이 아내도 남편의 존중과 응원이 필요한건 마찬가지다. 특별히 육아라는 전쟁터를 지나갈 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이야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부부가 함께하는 육아가 디폴트가 되었지만,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여전히 육아 비중은 여성이 더 많은 것 같긴 하다. 육아 말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아내라면 남편의 존중은 정말 꼭 필요하다. 나는 하고 싶은게 많은 여자라 그런지 아내 존중이라는 키워드를 꺼내준 남편에게 고마웠다.


존중, 그래.

공유가 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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