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험과 시대정신

by Lohengrin

우리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험을 치러왔다. 학창 시절 월말고사, 기말고사를 비롯하여 입학시험, 입사시험을 거쳐 승진시험까지 평생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종이 위에 검은색 동그라미를 치는 시험뿐만이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회 자체가 시험 문제다.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을 '산다'라고 한다.


시험(試驗 ; examination)은 "재능이나 실력 따위를 일정한 절차를 따라 검사하고 평가하는 일"이다. 사람의 됨됨이를 알기 위해 떠보는 일이나 상황도 시험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지에 답하는 경우를 일컫는다.


문제에 답을 하는 시험유형이 경쟁을 부추기고 줄 세우기 문화를 만드는 주범임은 이미 교육시스템 속에서 증명되어 개선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와 형평의 제공, 명쾌한 결과의 확인 등의 장점 때문에 아직도 사회 저변에 자격을 부여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객관식 문제 유형의 질문은 '아는지 모르는지'를 판별해 내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임에는 틀림없지만, 몰라도 찍을 수 있다는 함정이 있다. 점수의 숫자가 곧 아는 수준이라고 할 때, 몰랐거나 아리송한데 찍어서 정답을 맞혔을 가능성의 허수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부풀려진 숫자의 환상이 들어가 있다. 즉 받아 든 시험 결과는 반드시 과대포장된 숫자일 가능성이 크다.


"시험 볼 때마다 울렁증이 있어 제대로 점수가 안 나온다"는 사람도 있고 "공부한 만큼 실력발휘를 못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확실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핑계일 따름이다. 모르는 것은 확실히 드러난다. 몰랐기 때문에 틀렸을 것이고, 헷갈리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점수는 나의 지식에 대한 바닥 점수 + 행운의 찍은 숫자까지가 포함되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열 사진작가의 신안 팔금도 신목 팽나무 시진. 2022년작.

이 사지선다형 시험의 문제는 아는 지식만을 묻고 답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현안의 해결 능력은 있는지, 비전을 갖추고 있는지 확인하기가 애매하다. 질문과 답안 유형을 통해 유추할 수는 있지만 그러기에는 질문이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많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원은 인공지능 시대에 들어오면서 의미가 없어졌다. 아직 약간의 혼선이 있긴 하지만 백과사전식으로 정답을 토해내는 AI의 업그레이드 속도는 가히 놀랄만하다. 지식을 축적하고 묻는 데 있어 개인 인간이 당해낼 수준을 넘어서 버렸다. 심지어 대화의 문맥을 추론하여 흐름을 이어가는 AI 수준을 경험하고 있다. 이미 객관식 시험을 넘어 주관식 시험에 답하는 단계로 진입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AI도 아직 잘 못 푸는 문제가 있단다. 옳지 않은 것을 찾거나 틀리지 않은 것을 찾거나 정답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다. 질문을 꼬아 논 것으로, 한번 더 유추해서 넘어가야 하는데 이 과정이 잘 안 된다고 한다. AI는 정답을 찾는 기계인지라, 정답이 아닌 것을 스스로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AI에게 "네가 모르는 게 무엇인데?"라고 물으면 한참을 망설이다 답변을 내놓는다고 한다. 최신의 AI는 이 한계조차 뛰어넘어 즉각 즉각 답변을 내놓고 있긴 하다. chatGPT 4o에게 물으니 "인공지능은 경험과 감정의 본질, 완전히 새로운 지식, 미래예측, 철학적 윤리적 판단, 창의성의 한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간과의 차이가 명확하다"라고 답변을 내놓을 정도다.


객관식이 지식의 범위를 묻고 논술형 주관식이 생각의 범위를 묻는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생각의 폭을 물어야 한다. 지식의 가장 낮은 암기의 단계에서 확장된 지식을 응용하는 수준으로 끌고 가기 위해서는 답을 고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답을 계속 유추해서 자기 생각으로 표현하게 해야 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문제인 책문(策問)도 대부분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묻고 선비들은 답안으로 대책(對策)을 내놓았다. 과거응시자들이 내놓은 답변지 대책 중에서 시대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1등 답안지를 압권(壓卷)이라고 한다. 시대정신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 정치적 사회적 동향을 나타내는 정신적 경향"을 말한다.


질문과 시험은 그런 것이다. 사지선다형 질문의 지식을 바탕으로 응용을 하여 드러내는 서술형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차원까지 가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시대정신을 읽고 알아차리고 개선에 나가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나가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이다. 공정과 상식, 법과 원칙을 입안의 혀로만 지껄이고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만 쓰는 옹졸함이 아니라 만인이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시대정신으로 승화시켜 유지해 나갈 때 한 발자국 더 진보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ps : 프로필에 있는 바오밥 나무 사진은 이열 사진작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찍은 작품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술을 좋아하는 사람과 많이 마시는 사람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