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이 되었든 해외여행이 되었든 여행 중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나요? 아니면 음악을 더 많이 듣게 되나요? 아니면 "그게 뭔데?" 인가요?
여행 중에 '책'과 '음악'이 함께한다는 것은 상당히 여유로운 일정일 때나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주로 가는 3박 4일 정도나 조금 멀리 가는 9박 10일 정도의 일정 중에는, 손에 책을 잡거나 귀로 음악을 듣는 일이 힘듭니다. 장거리 비행기 안에서라도 책을 펼쳐 들기도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공항에 나오느라 서두른 탓에 피로가 밀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책이 수면제가 됩니다. 비행 중 기내 소음 차단의 백색소음으로 헤드폰을 써보기도 하지만 역시 자장가로 들리게 됩니다.
여행과 책, 음악의 관계는 궁합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조합이 조금 어렵습니다. 물론 일정 내내 휴양지 리조트에 머물며 쉬는 경우는 예외일 수 있으나 그나마 가만히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여유를 갖기가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누구와 여행을 가느냐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여행패턴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행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책과 음악은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이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에 그렇습니다.
가족 구성원을 비롯해 몇몇 동행인이라도 있으면 여행 중에 책을 펼쳐 들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굳이 여행까지 와서 책을 손에 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습니다. 여행은 곧 즐기러 가는 것이고 현지의 풍광을 만나고 생경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으로도 다이내믹한데 눈을 책 속의 활자로 옮기고 귓속의 간질거림으로 채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수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여행지에 관련된 것이라면 여행을 떠나기 전 이미 숙지하고 현지에서는 확인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평소에 애독하던 책이라면 여행 중에는 잠시 접어두는 게 더 맞을 겁니다. 책 속의 허구가 아니더라도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생소함이 더 진실이고 값진 것임이 분명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가방 속의 책은 말 그대로 짐일 가능성이 거의 99%입니다. 고백컨데 저도 여행 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항상 책을 한 권 넣어가지만 완독하고 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책의 절반정도 읽으면 다행입니다. 그나마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인피니트풀 사이드의 선베드 자리를 맡아놓는 허세 작렬의 장식품일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은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눈으로 풍광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보는 눈의 피로보다는 음악을 들으며 바깥풍광을 쳐다보는 장면이 더 낭만적이고 멋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의 목적지가 정해지면 그 목적지에 맞는 음악을 찾아 휴대폰에 저장해 놓습니다. 부산에 가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어야 하고 대전에 가면 '대전부르스'를 들어야 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런던에 가면 ELO의 'last train to London'을 듣고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를 달릴 때는 'O sole mio'와 'Toma a Surriento'를 들어야 하며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천정화 아래에서는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Miserere mei Deus'를 들어야 하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건널 때는 'Sanfrancisco'가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여행지와 관련된 책 속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지는 장엄함보다 귓속에 울려오는 노랫소리의 주파수가 감성을 자극하기에 더 효과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머릿속에 스틸사진 찍어내듯 각인시켜 줍니다. 시각보다 더 원초적으로 발전했던 청각의 힘입니다. 여행의 운치를 가미하고 배가시키는데 음악은 최고의 역할을 합니다. 태양이 작렬하는 열대의 해변에 있을 때 비치 보이스의 'Surfin' U.S.A'가 들려오면 자연스럽게 엉덩이가 씰룩거려지며 반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여행에는 책보다는 음악이 더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습니다. 꼭 여행지와 연관된 음악이 아니더라도 여행 중에 느껴지는 감성에 어울리는 곡이나 약간의 들뜸이 필요한 경쾌한 음악이 있으면,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하고 더욱 편안하게 합니다. 세비아 길거리에서 본 강렬한 플라멩코 춤과 음악의 울림이 종소리 여운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면 다시 가기 위해 항공편을 검색하고 숙소를 찾아보게 만듭니다. 음악이 여행의 미끼처럼 추억을 물고 떠오릅니다.
음악은 책 보다 여행을 더 의미 있게 포장하는 연금술사임이 틀림없습니다. 음악과 여행은 이성보다 감성을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하얀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앞산을 바라보면 요시 이쿠조의 노래 설국(雪國 ; yukiguni)이 떠오르고 삿포로의 스노몬스터와 설경이 오버랩됩니다. 음악과 여행은 그런 상관관계이자 인과관계로 얽혀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우연의 확률로, 필연이 된 관계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