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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는 이럴 때 좋다

by Lohengrin Mar 18. 2025

3월 중순을 넘어 서울에도 산수유가 개화했다는 꽃소식이 들리기 시작하고 아파트 뜰에 서있는 목련나무 꽃몽우리도 털옷을 열고 흰색 속살을 살며시 보여주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이 내려 봄의 전령을 묻어버리고 있습니다.


휴대폰에는 밤새 '안전 안내문자'가 3개나 들어와 있습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어 출근길 미끄럼 사고에 주의하라는 안내를 국토교통부 및 구청 등에서 친절히 해주고 있습니다. 휴대폰 메일을 정리하고 부스스한 눈으로 창문 곁에 다가가 밖의 풍광을 내려다봅니다. 아침 6시 반인데 한겨울 내리는 눈처럼 내리고 있고, 밤새 내렸는지 주차장의 차 지붕 및 정원 가로수에 흰색 꽃들을 대신 피우고 있고 눈 무게가 상당한 지 가지들도 그 무게를 버티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갑자기 현관 옆에 서 있는 목련나무들의 꽃봉오리들이 잘 있는지 염려가 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햇볕을 잘 받는 나뭇가지 쪽 꽃봉오리들은 버들강아지 같은 털옷을 열고 있었는데 밤새 눈의 무게에 눌려 떨어지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세수도 안한채 외투만 입고 내려가 봅니다.


온통 흰 눈을 이고 있어 꽃봉오리들이 어디 있는지 분간하기가 힘듭니다. 자세히 쳐다보니 다행히 눈들이 이불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여 안심이 됩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지 않고 있어서 눈이 그치면 금방 녹아 오히려 수분을 제공할 듯합니다.


안심을 하고 나니 흰색의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호사가 출근을 하지 않는 백수였기에 가능함을 퍼뜩 깨닫게 됩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백수가 아니었다면 "아이씨~ 출근해야 하는데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면 어떻게 해? 패딩을 다시 꺼내 입어 말어. 스니커즈도 새로 샀는데 낮에 눈 녹아서 질척이면 물들고 할 텐데. 차를 운전해서 출근할까? 미끄러워서 난리도 아니겠지?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하려나? 다들 전철로 몰려들면 아~~ 씨 짐짝처럼 실려가겠군. 패딩 입었는데 찜질하게 생겼네" 등등 불평불만이 가득한 아침이었을 겁니다.


백수의 호사란 이런 겁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되는 일이 있다는 겁니다. 


상황이 현실을 만듭니다.


그렇다고 모든 백수의 시선이 긍정적일 거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밖에 눈이 온다고? 오든지 말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길이 빙판이 되든 말든,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든 말든 뭐 어쨌다고?"라고 들이 밀 수 도 있습니다.

 

흰 눈이 오면 흰 눈이 좋은 백수가 되어야 하고, 꽃이 피면 피는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백수여야 진정한 호랑이가 될 수 있습니다.


3월에 내린 눈이 아무리 두껍게 쌓여 있다고 해도 봄은 봄입니다. 비가 눈으로 잠시 형상만 바꿨을 뿐입니다.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이 구름을 걷어내고 내려오는 순간, 한나절도 안되어 눈 녹듯이 사라질 겁니다. 3월의 폭설은 일장춘몽입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합니다. 3월의 눈 속 풍경은 잠시 들러가는 자연의 휴게소입니다.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는 아쉬운 여운을 남기는 미련입니다.


즐기면 됩니다. "내가 언제 또 3월에 눈꽃을 보고 눈길을 걸어보겠어" "당장은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걷겠지만 덕분에 다리에 힘도 줘보게 되네"라고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세상이 미소가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강원도 산간에는 40cm가 넘은 폭설이 내려 학교도 휴교하고 도로도 끊겼다는 소식들이 있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겐 폭설이 재앙 수준임에 틀림없습니다. 


낭만 어쩌고 긍정 어쩌고 하는 것은 그저 도시에 사는 백수의 허당미일 뿐이고 자족임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환경의 일부로 위치한 현존에서 어떻게 세상을 정의하느냐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지금 3월의 눈 내리는 아침은 저에게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읊었던 김춘수의 시가 오버랩됩니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백수의 눈에 비친 3월의 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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