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가끔 저녁이면 아파트 관리실에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듣곤 한다. "입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베란다와 계단,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분들로 인해 위층 세대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공동주택 내에서의 흡연을 삼가 주시고, 모두가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런 방송은 유독 날씨가 매서운 겨울철에 많이 듣게 된다. 살을 에듯 추운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 피우기가 번거로워지자, 누군가는 결국 실내 흡연이라는 유혹에 굴복하고 마는 모양이다. 이런 풍경을 마주할 때면, '아직도 우리 곁에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꽤 남아 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사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한때 자욱한 연기 속에 살던 지인들이 이제는 대부분 금연에 성공했다. 흔히 "술 끊는 사람보다 담배 끊는 사람이 더 독하다"고들 하는데, 내 주변에는 어느새 그런 독한 마음을 품은 이들만 가득해진 셈이다.
나는 평생 담배 연기를 목구멍 깊숙이 넘겨본 적이 없다. 애초에 담배를 피우는 법 자체를 배우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물론 흡연이 별도의 훈련이 필요한 고도의 기술은 아니겠으나, 나는 그 습관의 문턱을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딱 한 번, 튀르키예 여행 중에 이색적인 경험을 해본 적은 있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물담배 카페에서 호기심에 빨아봤다. 물담배는 심호흡하듯 깊게 숨을 들이마셔야 연기가 빨려 올라오기에 몇 차례 힘껏 들이켜 보았다. 입안 가득 화한 박하 향 연기가 감돌았지만,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몽롱함이나 특별한 고양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세상에는 이런 문화도 있구나" 하는 가벼운 체험으로 기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유난히 담배 연기를 혐오하거나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담뱃값이 아까워 근검절약을 실천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하지 않았을 뿐이고, 굳이 그 맵싸한 연기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도 일지 않았을 따름이다.
유전적으로 담배를 거부하는 체질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의 조부께서는 평생 곰방대에 담뱃잎을 정성껏 말아 피우셨다. 연무를 다 내뱉으신 후 철제 재떨이에 담뱃대를 '탕, 탕' 하고 터시던 그 경쾌하고도 묵직한 소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선명한 잔향으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에게 흡연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사랑방에서 담뱃재 터는 소리가 들려오면 "아, 이제 외출 채비를 마치셨구나" 하고 눈치를 채곤 했다. 담배는 조부에게 일상의 기어를 바꾸는 준비운동이었던 셈이다. 아버님 또한 말년에 중풍으로 고생하시기 전까지는 늘 담배를 곁에 두셨다.
나 역시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연기를 폐부 깊숙이 넣지 않고 입안에만 머물게 하는 '뻐끔담배' 정도는 여러 번 시도해 보았다. 대학 1학년 시절, 성남 문무대로 일주일간 병영집체훈련을 떠났을 때가 기억난다. 훈련 사이사이 주어지는 짧은 휴식 시간, 동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친구의 담배를 한 대 빌려 물어보았다. 그러나 고된 훈련 탓인지 입안은 그저 까칠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터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입술이 튼 것이 오로지 담배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피우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이 그렇게 핑곗거리를 찾아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유혹의 갈림길에서 나는 결국 흡연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선택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무실 책상마다 재떨이가 놓여 있고 실내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있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회의실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격론이 오가는 와중에 재떨이가 공중을 날아다녔다는 무용담이 전설처럼 내려오던 시대였다.
비흡연자인 나조차도 가끔 담배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대학 졸업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기자 초년생 시절의 이야기다. 취재원들의 마음을 열고 고급 정보를 얻기 위해 담배는 훌륭한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 흡연하는 취재원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고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드리는 것이 예의이자 전략이었다. 그 짧은 찰나의 불꽃과 연기 속에서 서먹했던 경계심이 허물어지곤 했으니, 담배는 호감을 사기 위한 가장 유용한 매개체였던 셈이다.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시절, 공항 면세점에서 산 '양담배' 두 보루는 최고의 선물 대접을 받았다. 세련된 디자인의 말보로나 켄트, 부드러운 맛으로 인기를 끌던 마일드세븐, 그리고 묵직한 풍미의 독일산 다비도프까지. 귀국길 가방 속에 챙겨온 이 담배들은 기다리던 지인들에게 건네는 가장 확실한 성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제 우리 사회에서 흡연은 더 이상 낭만도, 사교의 도구도 아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흡연자들은 이제 아파트밖 구석진 흡연 구역을 찾아 헤매는 '유목민'이 되어버렸다.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끊고 말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 법한 환경이다.
과거에는 담배 연기가 마초적인 매력이나 고뇌하는 지식인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나, 이제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냄새의 공포'이자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전자담배의 보급으로 특유의 찌든 내는 줄었을지 모르나, 흡연자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담배는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기호품이다. 흡연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면, 그것은 개인의 선택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건강에 이롭고 해롭고를 따지는 과학적 논의를 차치하더라도, 삶의 위안이 된다면 그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엄격한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지정된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자유지만, 불씨를 제대로 꺼 화재를 예방하고 길을 걸으며 타인에게 연기를 내뿜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는 필수적이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몸에 밴 담배 향이 누군가에게는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배려, 그것이 현대 사회의 흡연자가 갖춰야 할 품격이다.
재래식 화장실이 있던 시절 담배는 악취를 가려주는 방향제였고, 누군가에게는 거친 멋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담배의 정의는 끊임없이 재정의되고 있다. 이제 담배는 우리 사회에서 점진적으로 퇴출되는 '황혼의 길'을 걷고 있다. 멋과 위로의 도구에서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한 물질로 변모한 것이다.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계십니까?"라는 짧은 물음 속에는, 담배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우리 시대의 달라진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