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미학

변호사, 은행가, 전업주부의 싸움

by 박보리

오늘도 싸울 거리들이 지천에 깔렸다. 나를 지나칠 테면 지나쳐봐라 하면서 혀를 낼롱낼롱데며 내 신경을 건드리고 조글조글 내 미간을 좁히게 한다. 어떤 것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기, 못 본 척하다가 운 좋게 잊어버리기 등등의 내공으로 잘 넘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수련한 스님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신이라도 가끔은 뻥 하고 터질 때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싸움을 부르는 문제는 지천에 깔려있고 수만 년을 변하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또 이번이 유난히 심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 항상 우리 신경을 스치며 거슬리게 하고 있다.


변호사 내외와 은행가와 전업주부가 있다. 은행가와 전업주부는 부부 사이인데 런던에 살고 있다. 변호사는 이들의 집주인으로서 저번 주 주말 방에 물이 샌다는 은행가 내외의 연락을 받았다. 물이 새는 걸 막 발견했다는 데 벽에 물이 줄줄 흘러내려서 침대가 젖고 다음날은 카펫이 다 젖었다고 했다. 변호사 내외는 배관공과 월요일 아침 와서 상태를 확인하였으며 위층의 샤워부스가 가라앉아 물이 샜다는 배관공의 말을 믿는다. 새벽같이 출근한 은행가네 집에는 전업주부와 아이만이 있으며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잘 들어보라고 한다. 배관공과 변호사 부인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전업주부는 애 밥 먹일 소중한 시간에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인가 미덥지 않아하며 들리지 않는 저들의 귀에 새로운 청각을 선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들린다 한마디 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이때까지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날 천장 구석에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서 천장 위가 훤히 보였다. 물이 새는 파이프를 찾아서 막았다 하였다. 이날 저녁 변호사의 훌륭한 이메일이 와있었다. 하루 종일 바빠 코빼기도 안 비추던 은행가는 메일로 부인에게 집주인들에게 말을 조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이때 전업주부는 변호사에게 화가 났다. 지금 이 흠잡을 데 없는 변호사의 글은 아주 명문이지만 매우 얄밉다. 자신의 입장을 엄선된 용어, 문장, 구성으로 써서 조목조목 따져 놓았다. 조용히 싸움을 걸고 있고 그 긴장감이 알파벳 한 자 한 자에 서려있다.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은행가는 부동산 중개업자, relocation회사에게 연락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하고 있다. 전업주부는 그런 은행가를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변호사는 이제야 이 문제를 알린 세입자에게 책임소재가 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고, 은행가는 즉답을 피하며 제삼자에 자문을 구하고 해결을 구했다. 싸움의 불씨는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어설픈 제삼자, relocation 회사의 직원의 개입은 집주인의 명문의 글에 더욱 기름을 붓고 있었다. 적어도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며 일에 파묻혀있는 것으로 알려진 은행가는 제삼자에게 문제 해결을 거칠게 종용하였고 이들은 우리가 세입 전인데 해당 문제가 생겨 이사가 지연된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전업주부 또한 왜 이 은행가는 집주인과 담판을 짓지 못하는지 추궁했지만, 결국은 너의 역할을 한 것이다라며 편을 들어주었다. 결국 감정적인 어휘까지 등장한 변호사의 이메일이 왔고 은행가는 출장 중이었고 전업주부는 속이 탔다. 이대로는 잠들 수 없음을 안 전업주부는 은행가와 상의 없이 홀로 변호사에게 이메일 회신을 했다. 싸움에 개입 혹은 중재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쿵쿵 거리며 배관공들과 다시 찾아온 변호사는 하나, 둘, 셋 카운트와 함께 전업주부의 이메일에 반론하며 들어선다. 한 때 로스쿨도 꿈꿔보기도 했던 전업주부는 반격하지 않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첫 번째 반론은 배관공들은 헬스 이슈로 인해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갈 수 없음. 두 번째는 젖은 침대는 본인이 아침에 전화하여 5분 만에 수거해가도록 해놨으며 배관공들이 아주 친절하게도 밖으로 옮겨준다는 것. 세 번째는 폐기하는 침대 보상에 관해서는 반드시 영수증이나 구매를 증빙할 만한 자료만 받을 것이며 그것은 보험회사에서 원하는 것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음. 전업주부는 다 납득한 것은 아니었지만 싸움이 목적이 아니라 방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하루속히 돌려놓는 것이 목적이므로 이 무례함을 넘기기로 하였다. 전업주부는 둘째 아이의 출산을 2달 앞두고 있었다.


이날 오후 해당 사건을 깔끔히 정리한 이메일을 변호사는 보내왔다. 조금 있다가 은행가는 꽃을 보내왔고 전업주부는 그 꽃이 반갑지 않았다. 다음날 은행가는 출장에서 돌아왔으며 전업주부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 하루를 보냈다. 도착해서 홀로 거실에 앉아 아이가 남긴 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하였고 다음날은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유모차를 미는 은행가를 보니 전업주부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비효율적인 업무환경에 시달리며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사는 이 은행가가 그 노련하고 재빠른 프리랜서 법정변호 전담 변호사에 대응할 능력이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싸움에서 이겼고, 전업주부는 실익을 챙겼으며, 은행가는 싸움을 걸었고 손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