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살림이나 중경삼림이나
여보-시오,
당신이 설거지를 잘해서, 혹은 잘할 것 같아서 사랑한 게 아니었지. 그런데 그게 오늘 밤 너무 거슬려. 심지어 나 옆에서 당신이 설거지하는 거 이렇게 지켜보고 있잖아. 정말 이렇게밖에 못 하는지에 잔소리하고 싶어 죽겠는데 그냥 옆에서 보고 있어. 고무장갑 좀 끼고 거품으로 뽁뽁 닦고 물로도 빡빡 닦으면 안 되겠니, 이 그릇들로 어떻게 밥을 다시 먹니... 목구멍까지 올라온 이 잔소리를 간신히 꾹꾹 눌러 담고 에둘러가는 한마디 뱉었지.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더니 진짜인가봐, 우리가 서로 완벽해서 사랑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돌이켜보면 내가 누군가를 떠나보낸 적이 꽤나 오래전 일이더라. 언제부터인지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임시적이다 생각했고 떠날 생각을 하며 살아왔어. 비정규직 인턴생활도, 전공과는 관련 없던 물류회사에서 정규직을 시작한 것도, 모두가 꺼려하던 해외파견도, 사표 쓰고 유럽으로 떠난 6개월 여행도, 연애를 위해 홍콩으로 떠난 것도. 어느 날 문득 내가 가진 것들을 떠나게 된다 해도 무덤덤할 수 있게 스스로를 훈련해왔지. 아마 마지막 캠퍼스 커플을 종료하며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차가운 현실에 매일 부딪치면서 스스로 그렇게 단련시킨 것 같아. 상처를 가장 적게 받을 수 있는 보호막을 치듯 그렇게 초연하게 덤덤하게 언제든 멋지게 떠날 수 있게 준비를 하자고.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언제든지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해왔지. 근데 그래서 더 열심히 악착같이 살 수 있었던 것 같아. 좋든 싫든 이 현실은 영원하지 않을 거니까 난 떠날 거니까.
한동안 그렇게 주욱 주변에서 나를 환송해주고 보내주고 그리워해 주는 것에 익숙했지.
그러던 내가 오늘 누군가를 한국으로 보냈네. 상냥하고 배려심 많은 그녀는 아들의 수업을 통해서 만난 엄마였는데 남편의 공부가 끝나서 이제 돌아가야 해. 마지막까지도 임신한 내가 힘들지 말라고 문 앞에 와서 인사만 한다고 온 그녀와 남편 그리고 이쁜 딸아이. 들어와서 따뜻한 차라도 밥이라도 먹이고 보내고 싶었지만 극구 사양하고 눈물만 짓고 갔어. 난 안 슬퍼 보였는지 짝사랑이었던 것 같다던 그녀의 농담에 정곡이 찔렸고 그러게 날 보니 난 내일 볼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어. 그녀는 한국으로 갔고 한동안 그 자리는 비워두고 싶은 나는 창밖의 낙엽 잎 사이로 햇살 사이로 바람 사이로 외롭다는 생각이 드네.
그리고 서류에 도장 찍지 않는 이상 이별은 없어야 할 인연이 된 남편이 설거지하는 걸 보고 있어. 사랑의 유통기한 운운하지만 모든 떠남에 마침표를, 혹은 쉼표를, 찍어준 사람인데 이따위 설거지가 지금 너무 눈에 거슬릴 줄이야. 중경삼림에서 금성무가 그랬어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그 부재의 외로움이 먼 거리의 그리움이 없는 매일매일이 똑같은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그 순간을 난 떠올려보고 있어. 당신이 완벽해서 혹은 설거지를 잘해서 사랑한 건 아니었지, 전혀, 오히려 평생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사는 우리 아빠만큼 잘 안 씻는 사람이었는걸, 내가 옆에 있음으로 당신이 좀 더 행복해질 것 같다는 자신이 있어서 그렇게 씩씩했던 그 연애의 순간을 말이야.
그러나 홀로 하는 육아와 둘째 아이 임신에 몸이 지쳐가고 다른 점 투성이인 영국에서 겪는 외부 문제들에 숨이 턱턱 막히다 결국은 덜컥 마주한 친절한 그녀와의 이별 속에서 나의 심장이 집 앞 가을 길바닥에 벗겨져서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아. 그녀가 떠나니, 언제나 그렇듯이 그 모습으로 내 옆에 항상 있을 당신이 갑자기 눈에 보이는 거야. 난 이제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를 수 없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국에서 잘 살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을 부모님의 시집간 딸인데, 갑자기 당신이 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고 난 이제 항상 그랬듯 무심히 떠날 수는 없어졌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벌겋게 벌겨 벗겨놓고 있네.
그러면서 생각해본다. 당신이 설거지하는 게 너무 거슬려서 권태기인가 싶지만 첨부터 당신이 설거지를 잘 할 가능성은 1도 없이 시작한 관계였음을. 나도 금성무처럼 읊조려본다. 내 사랑도 너와 내가 시작할 때의 그 마음으로 리셋해서 그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고. 그리고 이 센티멘탈한 기분은 어여 치워야 아들 밥이라도 한 끼 잘 지어줄 수 있다고, 그만 청승 떨고 따끈한 물로 샤워하고 온기를 찾고 엄마가 될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