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 수여식때 감수해야 할 위험 중 하나가 졸업 축사가 아닌가 합니다. 우연과 의지와 기질이 기막히게 정렬돼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교묘하거나 진부한 자기자랑을 듣고 말 확률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을 한국인으로 최초로 받은 허준이 프린스턴대학 교수가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한 말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OLDhaqosPtA&ab_channel=%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SeoulNationalUniversity)
기업 소개서나 이력서를 읽어 내리는 듯한 여느 졸업 축사와 다르게 그의 졸업 축사는 그가 젊은 시절 오랫동안 길을 잃었음을 잔잔히 고백하며 예쁘게 포장된 성공스토리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대한 격려로 마무리된다.
우리 사회는 실패에 대해 너무나 인색하다. 지나치게 성공과 결과에 대해서만 부각하며, 실패 뒤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도 실패를 극복하였던 과정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에 주저하며, 몇번의 실패를 거듭하면 심하게는 실패자라는 주홍글씨를 붙이기도 한다.
실패가 빈번한 국내 창업생태계 역시 여전히 실패에 대해 인색하긴 마찬가지다. 창업자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미디어는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기업과 학계는 성공 방정식의 변수와 상수를 설명하는 것에만 열을 올릴 뿐이다.
최근에는 ‘회복탄력성’이란 용어가 창업업계에 차용되며 실패를 긍정적으로 극복하자는 시각이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낯선 개념이고 실패를 자연스레 용인하는 시각은 소수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창업자들이여, 실패를 추앙해라’라고 외치는 행사를 발견했다. 헤이스타트업이라는 창업지원재단에서 판을 깔아주고, 창업자들의 실패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개인적으로 ‘실패’라는 주제에 큰 관심이 있기에, 창업자들의 실패 이야기를 모아서 들을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행사의 호스트는 실패로 산전수전을 겪은 창업자 10여명, 그리고 실패 사연을 응모 받고 선발한 30여명을 초청했는데 모두를 ‘삽질러’라고 호칭했다. 특히 창업자 삽질러들은 아래와 같이 ‘삽생님(삽질 선생님)’이라는 형광색 완장을 채워 특별함을 더했다.
그렇게 한남동의 작은 술집에서는 40여명의 삽질러들이 모여 술과 이야기를 함께 했다. 마치 낚시꾼들이 서로의 대물을 비교하듯, 40명의 삽질러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삽의 크기와 삽질의 깊이를 비교하느라 시간이 흘러가는 줄을 몰랐다. 오후 6시에 시작한 모임은 자정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으며, 많은 이들이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특별 연사격으로 초청된 ‘삽선생님’들의 면모는 정말 다양했다. 최근에 폐업하며 수십억의 투자금을 날린 공유주방대표, 연이은 창업 실패로 낙담해 지리산에 들어가 기대없이 조용히 시작한 아이템으로 대박을 터트린 재능연결플랫폼 대표, 창업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유니콘의 몰락을 함께한 회계사 출신의 대표, 12번의 창업속에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한 대표등등…
이들의 모임은 서로의 실패를 위로하는 숙연한 시간이 아니었다. 실패 따위는 스쳐지나가는 바람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의 모임에서 실패라는 주제는 축제의 안주거리였을 뿐이다. 실패를 추앙하는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삽질러들은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금삽빠리나잇’ 모임은 언론과 미디어, 어떤 창업자 특강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와 그들의 솔직한 속내를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모임에 언론 관계자분, 심지어 스타트업 전문 기자분들이 몇 분 왔음에도 행사가 끝나고 기사 검색을 해보니 '금삽빠리나잇'에 대한 아무런 내용이 없었다. 이런 유쾌하고 유익한 모임에 직접 참석하고도 관련 기사를 작성하지 않는 것을 보면 여전히 ‘실패’는 외면받는 주제인 듯하다.
즐거운 시간 뒤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