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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요나 Sep 15. 2018

가을엔 온천을 가겠어요

내 몸을 위한 가장 따뜻한 시간


광화문을 따라 걸어올라 가노라면 삼청동 옛길이 펼쳐진다. 골목골목 멋진 커피점들과 예쁜 옷가게들이 즐비한 삼청동 길은 어느새 유행에 발 빠른 젊은이들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지금은 사진관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지만, 삼청동에서 서촌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보면, 특유의 거대하게 솟아오른 붉은 굴뚝에 흰색 페인트로 크게 이름이 써진 ‘코리아 목욕탕’이 먼저 보였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 사이로 불쑥 솟아오른 목욕탕 굴뚝은 처음 그 동네에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그 때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해 주는 서울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진 추억의 건물이었다.

일본 영화 ‘행복목욕탕(Her Love Boils Bathwater. 나카노 료타 감독. 2016)’을 보면 목욕탕 입구에 높은 단이 있고 그 위에 올라앉은 주인이 남탕과 여탕을 두루 훑어보며 입장료도 받고 우유도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대적인 24시간 사우나만 다녀본 젊은이들의 눈에는 일본의 혼탕 문화가 민망하게 보인 장면이었겠으나, 한국에서도 70년대까지는 그러한 목욕탕 시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옛날 동네에 하나밖에 없던 공중목욕탕에는 중앙에 커다랗게 많은 사람이 몸을 불리는 온탕이 있고 사람들은 그 주변에 둘러앉아 바가지로 물을 퍼서 때도 밀고 머리도 감고 헹구는 물로도 썼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면 어찌나 많은 사람들이 때를 밀러 오는지, 앉을 자리는커녕, 물푸는 바가지를 차지하기 위해몸싸움까지 하는 풍경이 다반사였다.

온수와 냉수를 손님 마음대로 틀수 있었던 중앙의 메인 욕탕은 어느 연령대의 사람들이 주로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 목욕물 온도가 달라졌는데, 머리가 허연 어르신들이 탕을 차지하고 계실 경우에는 가히 끓는 용암물에 온몸이 튀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뜨거운 욕탕 한 가운데서 증기를 빨아내는 역할을 하는 거대한 굴뚝은 탕 안에서 올려보면 하늘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맞는 찬바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해서 미처 물기를 다 닦지 못하고 나온 머리카락을 꽁꽁 얼려버리던 추위도 더 이상은 느낄 수 없었다.

대한민국 목욕문화의 변천사


우리나라의 근대 대중목욕탕 문화는 일제강점기였던 1924년 평양에 처음으로 목욕탕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났다. 당시 한국의 유교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는 것은 천민들이나 하는 짓으로 여겼기 때문에 공중목욕탕을 짓는 데는 사람들의 큰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공중욕탕이 처음 세워진 때는 1925년이었다. 8.15광복 이후 인구의 증가와 위생관념의 발전으로 사설목욕탕의 숫자가 늘어나자 한때는 도시민의 공중보건을 위한 복지시설로 시립공중욕탕을 설치하여 지방공무원이 운영과 관리를 맡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목욕문화는 ‘목욕재계(沐浴齋戒)’라 하여, 목욕을 향유하며 몸과 마음의 청결을 중시하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였다. 삼국시대에 목욕은 종교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당시 불교 경전에는 하루에 몇 번 목욕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 나와 있을 정도로 목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3월 상사(三月上巳: 3월 첫 뱀날) ‘계욕(戒浴)’의 날에 신맞이 굿을 벌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삼월삼짇날 산속의 맑은 물에 몸을 깨끗이 씻어 신맞이에 대비한다.’는 의미로, 문헌상 가장 오래된 목욕기록이다.
고려시대부터는 목욕이 사람들에게 질병치료와 예방의학의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들이 하루에 서너 차례 목욕을 했고 개성의 큰 내에서 남녀가 한 데 어울려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부터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시행하면서, 종교적인 목욕문화는 위축되고, 고려 때의 자유분방했던 일반백성들의 목욕도 도덕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남녀의 혼욕은 말할 것도 없고 알몸 노출목욕은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다. 부득이 목욕을 할 경우에는 옷을 입은 채로 씻어야했고, 전신 목욕 보다는 대야 등에 물을 받아 부분적으로 몸을 씻었다.
‘화냥녀(환향녀:還鄕女)’라는 말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간 많은 여성들이 전쟁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을 가리킨 말이다. 하지만 막상 고향에 오자 청나라에서 몸을 더럽힌 여자라 하여 받아들여주지 않았고, 이에 많은 여성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인조는 “한강, 소양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예성강, 대동강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으니 환향녀들은 그 강에서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씻고 돌아가도록 하라.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법으로 다스리겠다.”라는 교지를 내렸다. 하지만 유교를 중시한 조선사회에서는 그녀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이후 몸 파는 여자를 가리켜 ‘화냥년’이라는 몹쓸 말이 생겨났다고 하니, 나라를 위해 중국으로 끌려갔던 여인들의 피 끓는 희생이 일제강점기의 일본군 위안부들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따뜻한 온천으로 떠나는 가을여행
 
한국의 온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 서천왕 17년(286년)에 “왕의 동생인 일우(逸友)와 소발(素勃)이 모반하였을 때 질병을 사칭하고 온탕에 가서 온갖 무리들과 어울려 유락(遊樂)을 즐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 성덕왕 11년(712년) 4월에 왕이 온천으로 행차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약 1,300여 년 전 신라의 동래, 수안보온천, 백제의 온양온천, 약 700여 년 전 고려시대에 백암, 유성온천, 500여 년 전 조선시대에 오색, 덕산, 해운대 온천이 발전되었다.


온양온천


 온양온천(溫陽溫泉)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의 하나로, 백제 때는 온정(溫井),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 조선시대 이후에 온양이라고 불렸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태조, 세종, 세조 등 여러 왕이 순행하였고, 세조는 ‘신천(神泉)’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영조와 정조도 이곳에 온궁(溫宮)이라는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온양온천은 탄산수소나트륨, 황산마그네슘, 탄산칼륨, 규산, 황산칼슘 등이 함유되어 있어, 신경통, 위장병, 빈혈, 부인병 등에 효험이 있다.

동래온천


부산의 동래온천(東萊溫泉)은 전설에 의하면 백로가 하늘에서 내려와 멱감는 것을 본 주민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샘을 파보니 온천물이 나왔다고 한다. “온정(溫井)은 현(縣)의 북쪽으로 5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 온도는 닭도 익힐 수 있을 정도이며, 병을 지닌 사람이 목욕만 하면 곧 낫는다. 신라 때에 왕이 여러 번 여기에 오고는 하여 돌을 쌓고 네 모퉁이에 동주(銅柱)를 세웠는데 그 구멍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수온은 63이며, 약알칼리성 식염천으로 온천수를 마시면 만성 위장병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류마티스성 질환, 운동장애, 신경통, 관절염, 피로회복, 혈액순환 장애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8㎡의 규모에 5060명이 동시에 이용 가능한 족탕도 유명하다.


덕구온천


울진에는 마르지 않는 온천 샘인 덕구온천(德邱溫泉)이 있다. 덕구온천의 역사는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명한 사냥꾼이 상처를 입고 도망가는 멧돼지 뒤를 쫓아 응봉산 깊숙이 들어왔다가 온천을 발견했는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계곡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멧돼지는 상처가 나아 달아나 버렸다. 그 뒤로 온천수가 외상과 피부 질환에 특별한 효험이 있음을 알게 된 주민들은 자연석을 주위에 쌓아 노천 온천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약알칼리성 온천수인 덕구온천은 칼륨, 칼슘, 철, 염소, 중탄산나트륨, 마그네슘, 라듐, 황산염, 탄산, 규산 등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서 신경통, 류마티스성 질환, 근육통, 피부 질환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관절염에 시달리는 병약한 노인이나 아토피성 피부로 고생하는 아이들에게 좋다고 한다.

도고온천


아산에 위치한 도고온천(道高溫泉)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의 전투에서 신라왕이 부상을 입고 이곳 양수로 치유하여 신라리라고 명명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신라시대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기도하여 어렵게 얻은 아들이 상반신은 소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사람의 형상이라 전국의 명약을 찾아다닌 끝에 이곳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나니 상반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는 영험한 온천이다. 도고온천은 약알카리천에 속하는 유황천으로 마치 삶은 달걀이 썩었을 때와 같은 역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신경통, 피부병, 위장병, 관절염, 피부미용 등에 효과가 좋다.


양양 오색온천


강원도 양양에 있는 오색온천(五色溫泉)은 높이 800m에 위치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온천이다. 조선 중기인 1500년경 이곳에 있는 성국사(城國寺)의 한 승려가 시냇가의 반석 위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발견하였는데, 오색석사 뜰에 오색화가 피는 특이한 나무가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오색약수라 불렀으며, 이곳에서 3㎞ 정도 떨어진 온천도 오색온천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유황성분이 많으며 피부병은 물론 신경통에 효과가 좋다.


 가을을 맞이하여 맑은 공기와 푸른 물속에 온 몸을 담그고 찬바람에 머리를 맑게 식히는 온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뜨거운 온천물속에 여름 내내 무더위와 불쾌지수로 뻐근해진 온몸을 시원한 노천탕에 푹 담그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녹아내리며 온몸이 날듯이 가벼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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