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버리는 사회
어제는 가브리엘 가르샤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1989년 육문사 출판초본으로 구입을 했다.
내가 처음 구입했던 바로 그 책이다. 어찌어찌하다 몇번이나 분실해 버렸지만, 결국 다시 구할 수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사람들이 추억의 장소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난 처음 읽었던 그 판본의 책을 몹시 아끼며 그리워하는 버릇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헌책방 주인들을 싫어한다. 이따금 오래전에 잃어버린 내 책들에 대한 기억을 찾으려고 헌책방에 나갔다가 헌책들에 매겨진 터무니 없는 가격에 정말 '욱'하는 마음이 들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한 해에도 몇 백톤의 책들이 쓰레기 가격에 폐기 처분 되고 있다. 헌 책은 물론 재고분의 새 책들, 구하기 힘든 고서들까지도. 헌 책을 파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양심적으로 책들을 저렴하게 판매한다면, 폐기처분되어 영원히 사라질 오래된 책들을 적어도 몇십퍼센트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책방에는 아무나 막 써대고, 막 찍어내고, 안 팔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문구점의 팬시상품처럼 예쁜 책들만 진열하지만, 사실 양피지에 써졌을 때부터, 돌판에 처음 새겨졌을 때부터 책은 글을 쓴 사람의 생각과 체온이 스며든 생명체였다.
정말로 좋은 책을 읽을 때면 책이 숨을 쉬는 것과 내게 전하려는 생각이 느껴진다. 이것은 진짜 글답게 써진 책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화자와 독자의 일체감이다.
내가 어릴 때는 세로로 인쇄된 책들을 읽고 자랐다. 임어당과 최인호씨와 법정 스님과 루이제 린저와 수없이 많은 진짜 작가들의 진짜 책들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참으로 행운이었다.
그래서 이 서툰 나의 글을 계속 써나가야 한다. 이것은 제대로 된 작가들의 살아 있는 책을 읽은 거의 마지막 세대로서의 책임감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얘기가 좀 옆으로 새는 것 같지만, '누가 전기차를 죽였나'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몇년전부터 자동차 회사마다 사활을 걸고 개발하는 하이브리드-친환경 자동차 개발에 대한 열의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터. 하지만 전적으로 전기에 의존하는 차는 속도도 느리고 차체도 너무 약하고 기타 악조건이 많아서 대중화 되는 것이 어렵다는게 대부분의 평이었다. 그래서 결국 기름과 전기를 반반씩 사용하는 차량들이 하나 둘 하이브리드라는 이름을 달고 개발 되었다.
그런데 시속 160km이상에 한번 충전으로 110km~120km를 달리는 전기차가 이미 1993년에 개발이 되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이미 오래전에 멋지고 날렵한 쿠페형 전기 자동차가 무거운 엔진과 소음도 없이 오로지 전기 베터리 하나만으로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 하고 다녔던 것이다. 하지만 이 멋진 차들은 마치 '로즈웰의 외계인'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점점 개발이 무기력해 지더니 결국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전기차를 없애 버렸을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자동차 업계였다. 기업이 가지는 수많은 이해타산과 정치와 로비와 투철한 배금주의사상과 마지막으로 무한한 (하지만 절대 무한하지도 않고 일부의 무리들에게만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는 석유)화석자원의 현명한 활용을 위해서 그들은 불보듯이 뻔한 북극곰의 죽음과 아마존이 흘릴 눈물을 무시한 채 전기 자동차들에게 사형을 선고 했다.
사람들이 생존하기위한 필수품에는 많은 전자 기기들이 있다. 전등, 믹서, 스탠드, 컴퓨터, 티비, 녹음기. 냉장고, 세탁기, 전기장판, 충전기, 게임기, 토스터기, 오븐, 에어컨, 정수기, 공기청정기 등등등. 인간들은 전자기기에 둘러 싸여 살아 간다. 걸어다니는 행위. 활동하는 행위. 생존하는 모든 것이 대부분 전기로 가동 되어 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기들의 99.9%가 전기로 돌아가는 이 초현대식 세상에서 오직 자동차만이 냄새나고 대기를 오염시키고 지구 온난화를 가중시키며, 입 돌아가게 비싼 기름을 넣고 다녀야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하고 당연한 최선인지는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잠실에 가면 '키자니아'라는 아이들의 직업체험테마파크가 있다.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아이들이 직업을 갖고 돈을 벌고 또 가상의 구매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곳이 즐거운 체험이라는 목적보다는 아직 어린 아이들의 의식속에 경제와 소비의 미덕을 일깨워주는 기업들의 교묘한 상술처럼 들린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돈을 벌어 새 것을 사는 기쁨을 누릴 것이고, 더 많은 것을 사기 위해 더 많이 일을 할 것이고, 더 많은 새 것을 얻게 되면 이미 헌 것을 미련없이 없애 버릴 것이다.
그것이 기업들이 원하는 마케팅의 제 1단계이다. 더 많은 노동과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착취를 위해서 기업들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신상품이라는 미끼를 던져준다.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교육을 받아서 새로운 것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장만하고자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손때 묻고 적당히 내게 낯이 익은 나의 물건이 내게 갖는 믿음을 너무 쉽게 허물어 버리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요즘처럼 책 많이 읽으면 일등, 영어 못하면 루저,라는 이상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시대도 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아이들 키우는 집들 대부분은 책이 너무 많아서 분기 별로 처분을 하고 기증을 하고 급기야 버리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넘쳐나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다.
이번 주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마르께스의 책값은 고작 3천원 이었다. 이 낡고 두꺼운 책을 읽으며 나는 꿈을 꿀 것이고 상상 할 것이고 나의 존재를 확인 할 것이다.
나는 낡은 것과 오래된 것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음에 감사한다. 옛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다.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발전과 파괴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과거와 미래는 공존해야 하는 것이고, 결코 미래를 위해 과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에게 이른 경제관념보다는 꽃 한송이의 아름다움을, 영어 노래 한 줄 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르치는 부모가 더 많아 진다면 우리 아이들도 진심으로 소중한 것을 구분 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들이 미래다.
해맑아야 할 아이들의 마음이 벌써부터 금전과 교육이라는 미명하게 병들어가고 있는 것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