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붉은 흔적은 정말 피였을까

by 가야천

팬티 속 얼룩, 공포의 시작


소변을 본 후 변기 속을 뚫어지게 보았으나 딱히 피가 섞였다고 할 만큼 붉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팬티 속을 뒤집어 보니 진한 갈색의 얼룩 자국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혹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량의 혈액이 섞인 혈뇨가 팬티에 묻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산화되어 갈색으로 변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5개월 전에 수술받은 방광암이 재발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팬티의 얼룩이 꽤 오래된 것 같다며, 세탁을 여러 번 해도 잘 지워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안심했다. 수술 직후 며칠간 심한 혈뇨가 있었으니 그때 묻은 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최근에 새로 사 입었던 팬티에도 갈색 얼룩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공포는 다시 나를 엄습했다.


나는 60대 중반, 30여 년간 공직에 몸담다 4년 전 퇴직했다.

퇴직 후 아내와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달콤한 시간을 보냈고,

행정사 사무실을 열어 제2의 인생을 조용히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봄, 벚꽃을 보러 관악산에 다녀온 다음 날,

사무실에서 소변을 보는데 색이 콜라색이었다. 처음엔 피로 탓이라 넘겼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 결과, 중년 이후 통증 없는 혈뇨는 방광암의 신호일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 근처, 비뇨기과에서 내시경 검사까지 받았고, 상급병원에서 '방광암' 확진을 받았다.


선택의 기로에서


방광암은 방광에 생기는 악성종양으로 종양의 깊이에 따라 '표재성'과 '침윤성'으로 나뉜다. 표재성은 내시경으로 종양만 긁어내는 치료가 가능하지만 재발률이 높다. 침윤성은 근육층을 넘어 다른 장기로 전이되기 때문에 방광을 절제해야 한다. 이 경우 복부에 소변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하며 따라서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진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자신의 소장을 잘라 인공방광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 또한 부작용이 많다고 했다.


나는 다행히 근육층으로 침범하지 않은 표재성이지만 종양이 여러 군데 있고 악성도가 높아 주치의는 방광 절제술을 강하게 권유했다. 나는 며칠간 숙고했고 의료는 통계이고, 내 몸은 예외일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내시경 수술을 선택했다. 종양이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기에 2차례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면역치료 중이며 3개월마다 추적검사를 받고 있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재발이 없다.


그러나 내시경 수술 후에 재발사례가 많다고 하고 나의 경우는 위험한 케이스에 속하기 때문에, 만에 하나 재발이 있으면 빨리 제거해야 하고 늦으면 방광을 잘라내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흰색 팬티를 입고 소변을 본 뒤 반드시 변기 속을 확인한다. 그것은 혹시 모를 혈뇨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밤중의 의심


그런데 어젯밤, 아내와 둘째 아들의 대화가 나를 침대에서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들이 욕실 변기 뚜껑에서 '피떡 같은 것'을 봤다는 것이다.

바로 욕실로 가서 확인해 보았으나 이후에 누가 닦았는지 변기는 깨끗했다.

아내는 자신이 샤워 중에 트리트먼트를 쓰다 틘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진한 밤색의 트리트먼트가 변기에 틘 걸 피떡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 설명에 기대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이 자꾸 마음을 파고들었다.


주말이라 둘째 아들 부부는 손주 민재와 함께 우리 집에 와 있었다.

민재는 내가 방광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 준 소중한 존재다.

오전엔 민재와 붙어 다니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밤이 되어 그 의문의 흔적이 계속 마음을 짓눌렀다.

이튿날 교회에서 예배시간 내내 집중이 안 됐다. 머릿속엔 오로지 '그 붉은 점액의 정체'만이 맴돌았다.


피떡의 정체


예배가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에게 어젯밤처럼 트리트먼트를 변기 뚜껑에 튀기게 했다.

정말 피떡처럼 보였다.

아들에게 보여주고 확인을 요청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색이 다르고 느낌이 달라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이어 절망이 다시 몰려왔다.

마누라가 "다시 한번 잘 보고 말해"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때, 며느리가 욕실로 달려왔다.

"어머님 혹시 변기에 묻은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어젯밤 민재가 딸기를 너무 많이 먹고 배탈이 났어요.

묽은 변이 튀었는데 급하게 닦다가 남았나 봐요."

그제야 모든 상황이 맞춰졌다.

아기들은 소화기능이 약해 딸기를 먹으면 붉은 딸기 똥을 눈다고 한다.

우리 민재는 딸기를 너무 좋아한다.

며느리는 민재를 돌보느라 바빴고, 아들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안도의 끝에서


며느리의 말 한마디에 나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왔다.

그 피떡은 방광암의 재발 신호가 아니라,

사랑하는 내 손주 민재의 '딸기 똥'이었다.

지난밤부터 나를 뒤흔든 공포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삶은 작은 해프닝 하나에도 무너질 수 있지만,

또한 작은 존재하나로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