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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희 Sep 01. 2020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신의 섭리인가? 인간의 자율인가?

인간과 신에 대한 고민의 흔적

솔직히 이 책을 제대로 된 완역본으로 읽지는 못했다. 2,00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읽기란 힘든 일. 그래서 조금 얇은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신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의 고민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전 생애에 걸쳐 신과 인간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과 사상이 집약된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썼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로 꼽힌.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평생 간질병에 시달렸 도박에 빠졌으며, 늘 빚에 허덕였다. 그러다 보니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글을 쓴 생계형 작가였다. 원고료를 미받은 후 마감이 되어서야 글을 고, 글을 쓰다가 여백에 원고료가 얼마인지 계산한 흔적도 많. 역작은 역시 절박한 삶에서 나오는 까?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에서 자본주의로 들어가는 시기. 유럽 자유주의 물결의 영향으로 그는 28세 공상적 사회주의 연구 서클인 '페트라세프스키 서클'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집행 전 왕의 특명으로 사형면했고, 대신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4년, 군 복무를 5년간 했다. 톨스토이처럼  역시 시베리아 유형지 범죄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인간의 본성깊이 있게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독서는 성경책만 허용되었기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인간관과 종교관의 바탕이 되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친부 살해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죄와 벌> 역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하필 범죄 소설일까? 살인과 같은 극한 범죄에서 인간의 숨겨진 본성, 내면이 잘 드러나기 때문일 이다. 우리는 평상시 페르소나를 쓰고 자신의 지위, 역할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모습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거나 감춰져 있다. 범죄라는 극한 윤리적 상황에서는  숨겨진 내면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작품은 아버지와 네 아들의 성격과 사상적 갈등이 가장 큰 축이다.


1. 인물 분석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인간 전체를 표한다. 탐욕스럽고 방탕하며 경박하고 흥분도 잘한다. 악착같이 돈을 모은 벼락부자로 거짓말도 잘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순수하고 눈물도 흘리는 진실한 마음도 갖고 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이러한 일면을 조금씩 닮았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미챠)는 무절제하고 자유로우며, 정열적, 본능적, 육체적이다. 그러나 순수하고 고결한 것을 동경하는 마음도 있다. 어찌 보면 아버지를 가장 닮았으며, 가장 러시아적인 인물이다. 

둘째 아들 이반은 이성적이고 총명하냉철한 지식인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와 무신론을 대변하는 인물이며 이론적이다. 그러나 비열하고 뻔뻔하며, 형의 약혼녀를 사랑하는 은근한 욕망도 갖고 있다.

셋째 아들 알렉세이(알료샤)는 순진무구하고 따뜻하며, 종교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누구한테나 사랑을 표현한다는 면에서 아버지를 닮았다. 

마지막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의 사생아로 표도르의 집에서 머슴처럼 살며 우직하게 일을 하지만, 간계에 능하다.


모든 인물 전형적이지 않다. 복합적이면서 모순되는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저자는 우리 인간 모두 복합적이며 한 면만 갖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희망이 있다.


2. 마음만 먹어도

살인 사건의 진범은 스메르자코프이다. 그러나 드미트리가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결국 형을 선고받는다. 왜 드미트리는 자신이 범인이 아님에도 순순히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까? 저자는 드미트리의 고통을 통해 '구원'을 얘기하고자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난을 겪으며 구원에 이르렀듯이, 드미트리 역시 자신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는 '마음만 먹어도 죄'라고 속죄하며, 진정한 자아성찰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기뻐한다. 그의 죄의식, 사랑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다.

사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흔히 볼 수 없다. 저자는 드미트리를 통해 '고통= 인간성 부활'의 희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알료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내 속에서 새로운 인간을 느꼈다. 내 안에 새로운 인간이 태어났어. 이 인간은 여태 내 속에 단단히 갇혀 있었기 때문에 만일 이번 일이 없었다면 영원히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을지도 몰라.
 나는 시베리아로 끌려가서 광산에서 20년 동안 쇠망치로 땅을 파는 것이 무서운 게 아냐. 새로 태어난 내 안의 인간이 사라질까 무서워. ...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 위해서 간다. 사실 누구든 한 사람쯤은 남을 위해서 가야 하지 않겠니? 땅 속에는 쇠망치를 든 몇백 명의 인간이 있다. 우리는 쇠사슬에 묶여 자유를 잃고 말지. 그러나 그때 우리는 커다란 슬픔 속에 있으면서 환희 속으로 태어나는 거다. 인간은 이 환희가 없으면 살아 남지 못해. 그래서 하느님이 있는 거다. .... "


이반은 어떤가? 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면을 드러냈다. 직접 범행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스메르자코프살인을 하도록 이론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살인을 방조했으며 사건 후 드미트리가 죄를 뒤집어쓰도록 손익 계산을 다. 그러므로 이반 역시 살인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도 공범인 것이다. 저자는 끝에 이반을 정신착란으로 정죄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고, 조금씩의 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쩌면 이반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인간성나타내 것인지 모른다. 표면적으로 악한 행동을 드러내 놓고 하지 않지만, 내심 바라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침묵하거나 보고만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3. 사상 대립(기독교 vs. 무신론)

이 작품에서 가장 논의가 많고 하이라이트인 장면은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대심문관' 부분이다. 이반은 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이 만든 세계를 부정한다며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을 신의 섭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인간이 책임져야 하는지 문제에 대해 '인간의 자율성(자유 의지)'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현실  문제에 대해 인간이 더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함을 보여준다.

 

반대로 알료샤는 이 세상이 신의 섭리대로 움직이고 있으며, 신앙만이 러시아의 미래를 보장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믿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다. 작품 속에서 '러시아의 수도승' 얘기가 조시마 장로와 알료사가 취하는 신앙관이다.  

이 두 부분은 저자가 기독교과 무신론, 즉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율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후 기독교인들이나 평론가들이 가장 많이 논의하고 분석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 역시 이 장면을 읽을 때 어떤 의미인지 곱씹으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살인 사건이 아니라 종교관이 핵심이네...하면서) 참 어려운 문제다.    


이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밤새도록 악마와 함께 있었다고 하고, 그 악마는 또 자기 자신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알료사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반 형은 진리의 빛 속에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복수하면서 증오 속에 멸망하거나 하겠지...'                           
                                                                   


저자는 결국 알료샤를 통해 자신의 종교관을 보여주고자 했다. 신앙을 통해서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첫머리에서 이를 보여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34절)


도스토예프스키는 애초 작품을 기획할 때 알료샤가 신과 혁명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정치범으로 처형당하는 내용까지 총 2부를 기획했다고 한다. 그러나 2부 완성을 지 못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알료샤보다 드미트리와 이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




현재에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불평등한 현실과 온갖 불의와 악행, 싸움과 전쟁, 무자비와 욕심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있다. '완벽한 신이 왜 인간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에 대한 답은 다 다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평생 이에 대해 고민했지만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 내린 것을 보면 답은 참 간단한 데에 있는 것 같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


사진출처 : 민음사



EBS 특별기획 통찰(洞察) - 도스토옙스키의 천국과 지옥 '양파 한 뿌리(고려대 석영중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quDR9oxXJI0&list=PLUTZAp1aUwGBz0Dx3oGfBAAYWUurTf0Rm


< 여러 글을 참고하며 느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문입니다. 202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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