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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May 07. 2023

비 오는 날의 여행


"안동에 갈까?"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가 함께 가자며 권하는 여행은 조건을 따지지 않는다. 더구나 이번 여행은 28주년 결혼기념일 여행이 아닌가? 그런데 안동이란 지역이 낯설지가 않다. '혹시 가 본 곳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안동 하회마을


동으로 가는 내내 비가 왔다. 비 오는 날 여행은 힘들지 않으냐고 간혹 누군가는 말한다. 우린 단호하게 '노'라고 말한다. 우린 비를 좋아하기에 오히려 우중 여행을 즐긴다. 비가 주는 여행의 즐거움은 의외로 많다. 우산 밑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그 어떤 연주곡보다 아름답다. 비 오는 날에는 맑은 날 만나지 못한 많은 것들을 만난다. 물기 묻은 초록, 싱그러운 풀 내음, 살갗에 닿은 빗방울의 차가움, 비를 싣고 불어오는 바람까지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닿지 않는 게 없다. 비 온 덕분에 여행객이 많지 않아 여유롭게 여행지를 만끽할 수 있음은 덤이다.





비 오는 안동 하회마을 풍경은 기대 이상 멋스러웠다. 우린 두 개의 우산 중 하나를 접고 같은 우산을 쓰고 걸었다. 그러다 꽃을 만나면 나는 우산 속을 뛰쳐나와 사진을 찍었다. 어느새 다가온 남편의 우산 아래에서 나는 꽃을, 남편은 나를 사진에 담았다. 한참 사진을 찍고 나서야 걸음을 옮겠다. 비가 오는 싱그러운 5월의 하회 마을의 매력에 빠져 최대한 천천히 하회마을 주민이 600년을 살아온 흙길을 걸었다. 기와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홀려 고개 든 순간, 흙벽 아래로 흘러나온 불두화와 눈이 마주쳤다. 아, 신음처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름답다는 표현을 세련되게 할 순 없을까?'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도 달리 표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가 와 그윽한 풍취를 느끼게 했던 하회 마을 여행이 끝나 도산서원으로 차를 돌렸다.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에 지어진 도산서원은 두 번째 방문이다. 이때서야 뒤늦게 안동을 2년 전에 방문했음을 알았다. 저질 기억력이라며 그와 웃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매화가 피었을 시기였고, 오늘은 연둣빛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비 오는 봄날이다. 매화 대신 작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도산서원은 고상함 대신 발랄한 활기가 느껴졌다. 같은 장소 다른 멋이다.




숙박 근처인 월영교에 주차하고 우린 비 오는 월영교를 걸었다. 비가 와서 물안개가 강을 하얗게 감싸 안았다. 물안개 가득한 월영교는 신비로웠다. 영화 같은 풍경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우린 영화 속 주인공처럼 손을 잡고 월영교를 걷다 다시 돌아와 돛단배를 탔다. 안개는 더 짙어졌고 빗방울 소리도 커졌다. 모터를 멈추고 잠시 배를 세워 물속으로 추락하는 빗소리에 빠져들었다. 빗방울이 강 표면에 닿아 흰 포말을 만들며 사라졌다. 우린 안갯속에 갇혀 입을 맞췄다. 남들이 보면 불륜이라며 깔깔거렸다. 안개 때문이었을까? 28년 산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밤이 되어 우린 숙소에 도착했다. 전화로 예약한 숙소가 맘에 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문을 연 순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깔끔한 침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청결함, 널찍함, 유리창 너머 보이는 비 오는 거리까지 만족이다. 짐을 풀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을 찾겠다고 나서자 갑자기 허기가 졌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찾은 식당은 셰프의 사진이 크게 걸린 '권셰프의 우렁 각시 장어 총각'이다. 우렁이 쌈밥과 우렁이 탕수육이라는 다소 낯선 음식 덕분에 끌렸고, 셰프의 얼굴이 저 정도 크게 걸렸다면 얼굴을 걸 만큼 음식에 자신 있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간절한 마음이 닿았을까? 풍미 가득한 음식, 근사한 음악, 친절한 직원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 삶도 얼굴을 크게 걸 수 있을 만큼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일박 이일 여행 중 하루가 지났다. 모든 게 완벽한 하루였다. 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연찮게 찾은 식당도, 남편이 신경 써서 고른 여행지도, 우연찮게 찾은 숙소도 작정하고 짠 각본처럼 완벽했다. 그에게 행복하다고 말했다.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꼈으니 행복한 것이지."


남편이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삶은 생각대로 만들어진다. 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끌어당김은 당연하다. 비가 온다고 불평하고 짜증을 냈다면 비 오는 풍경을 맘껏 즐길 수 없었을 테다. 비가 와서 좋다고 맘먹으니 모든 것들이 좋았다. 여행 내내 운전하고 신경 써준 그가 있어 편안한 시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하루였다. 완벽한 하루처럼 앞으로 남은 시간도 오늘 같을 것이라 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팔딱거리는 심장으로 생생하게 살아낼 것, 그게 우리가 할 몫이고 미래다.



여행이 끝나가는 날 카페에서 그에게 물었다.


28년 결혼 생활 우린 나름 잘 살았잖아. 지금 당신은 어때? 평온한가?

이제 싸울 시기는 지났지. 지금이 좋아. 내려놨으니까.

뭘 내려놨는데?

너에게 바라는 걸 모두 내려놨지. 

ㅡ어떻게 내려놨어?

ㅡ포기했지.

푸하하하 포기한 거였구나. 포기하게 만든 것도 기술이야. 당신은 결국 나 덕분에 평온해진 거네.


억지 부리는 나를 보며 그가 웃는다. 빗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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