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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Jun 06. 2023

일상의 철학자

대화가 필요해


27주년 결혼기념일 그와 함께 안동 여행을 떠났다. 안동의 하회마을, 월영교, 도산서원, 부용대 등 여러 곳을 방문하고 숙박지로 정한 호텔 앞 맛집을 찾았다. 발품 팔아 직감으로 찾아간 곳이 꽤나 만족스러운 식당이었다. 우리 만의 자리를 만들어줄 만큼 센스가 있는 주인장의 배려로 우린 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27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그동안 나랑 살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어?"

그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없어."

그럴 수는 없을 텐데 싶어 다시 물었다.

"정말? 진짜 하나도 없어? 난 있는데."

"힘든 거 다 까먹었어. 힘든 걸 왜 기억해. 지나간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가 왜 중요해? 다 소용없는 일이야. 기억 안 나."

남편의 대답은 단호했다. 하긴 안 좋은 일을 오래도록 기억할 필요는 없다.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당신의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힘들게 한 일이 없는 게 맞지?"

좋지 않은 일이 생각 안 난다는 그에게 마누라 덕이라며 우겼다.



다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랑 살아온 시간을 후회하지 않아?"

"당연히 후회하지 않지. 오히려 좋았지. 고맙고."

예상한 답이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신중하게 답을 풀어냈다. 함께 살아온 시간만큼 할 질문거리가 풍부했다.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너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나한테 피해 안 주고. 특별한 거 뭐 있나? 네가 뭔가를 하면서 즐거우면 돼. 그동안 먹고살기 위해, 아이들을 위해 살았다면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돈 벌 터니 너는 돈 때문에 일하지 않아도 돼.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남편의 답은 부인인 '내가 어떤 삶을 살았으면 좋겠냐?' 는 뜻이라 오히려 가슴에 오래 남았다. 나는 나의 시선으로 남편을 판단하고 해달라고 요구하지만, 남편은 타인의 시선으로 생각하고 답을 내줬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자신보다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큰 싸움 없이 살았구나 싶었다.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는 남편 덕분에 질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나한테 뭔가를 많이 사주잖아? 주는 게 아깝지 않아?"

"뭐가 아까워. 너는 나한테 주는 게 아까워? 난 전혀 아니야. 오히려 즐겁지."

"난 아까울 때도 있는데."

너무 솔직했나 싶을 만큼이었지만 답하면서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당신은 나에게 모든 걸 해주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가끔은 손해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조용조용하던 그의 말투에 강한 엑센트가 들어갔다.

"부부간에 손해가 어딨어? "

"그럼 뭐가 있어?"

그의 대답이 궁금해 다시 물었다.

"부부간에 손익을 따지는 게 아니야. 뭔가를 해주면서 손익을 따지는 게 부부야? 손익을 따지는 건 부부가 아니야. 손익은 밖에서 따지는 거지 부부간에서는 따지는 게 아니지. 손해라는 말 자체가 부부 사이에서 나오면 안 되는 단어야. 뭔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을 때 기분이 좋아.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따지는 건 아니지."



대답을 듣고 감동이 일어 고백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었다.

"당신과 대화하다 보면 내가 덜 익었다 생각해. 당신은 나보다 그릇이 크고 깊이가 달라. 당신이 양푼이라면 난 종지야."

그가 주제 파악을 잘한다며 농을 건넸다.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그게 가장의 마음이야. 가장이 되면 철이 들게 돼. 가족을 위한다면 뭐든 다 내놓을 수 있어. 내가 열심히 일한 것도 모두 가족을 위해서야. 만약 혼자 산다면 지금처럼 부지런하게 살지 않았을 거야."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많으면 평화로울 것 같아."



답변에 진심을 쏟아준 남편 덕분에 질문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살면 되지. 미래라고 크게 달라질 건 없는데. 지금도 우린 여행 다니고 산에 다니면서 행복하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고. 서로 좋아하는 일 하면 되지. 지난 시간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 행복했으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살면 되지. 일상이 놀이터라고 생각하면 돼. 돈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놀이터다 생각하며 즐기면 다른 길이 나오겠지. 지금이 즐거우니 당연히 미래가 즐거울 거잖아."



진중한 대답이 끝나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어떤 부인이 되었으면 좋겠어?

"뭘 바란다는 질문 자체는 그렇고. 옆에만 있어주면 돼. 뭘 해줘야 한다는 건 기대잖아.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욕심이지. 기대하면 관계가 힘들어져. 포기할 건 얼른 포기해야지. 부부라는 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지. 나한테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는 건 욕심이지. 네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 고마워. 가장 당부하고 싶은 건 건강이니까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자. 무식하게 참지 말고. "



마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남편의 답변은 술술 이어졌다. 그의 답변을 들을수록 가슴이 뻐근해졌다. 대화하는 그 시간이 28주년 여행에서 가장 맘에 드는 순간이었다.


자꾸 웃게 만든 이가 있다.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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