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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옥 Sep 11. 2021

목줄

“하필이면 오늘 죽다니…….”

염소가 죽은 걸 보고 슬퍼했던 맘도 잠시, 녀석에 대한 원망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온통 머릿속은 오늘이 합격자 발표 날이라는 사실뿐이다. 바르르 떨고 있는 입술은 ‘하필이면’만을 되뇐다.






열세 살의 여름날이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무화과나무 밑에 누었다. 잎이 넓은 무화과나무는 제법 널찍한 그늘을 만들어 줬다. 강렬하게 쏟아지던 햇살도 무화과 그늘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무화과 그늘에 누워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시커먼 물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저 물체에 부딪혔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다. 피해야 했다.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였다. 누군가 날 깨워주길 간절히 갈망했다. 그때였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염소였다. 애타게 녀석을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내 맘을 알았을까. 아니면 우연의 일치였을까. 녀석이 다가오더니 뺨을 핥았다. 까칠한 녀석의 혓바닥이 얼굴에 닿자 공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독한 가위눌림이었다.



사실 염소는 골칫거리였다. 학교 가기 전 아버지는 목줄을 쥐여 주고는 학교 근처 풀밭에 매어놓으라고 하셨다. 녀석을 끌고 학교에 간다는 것은 여간 창피한 일이 아니다. 아침마다 밥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녀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지곤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 몰래 슬쩍 도망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아버지의 불호령을 비켜갈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마치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는 무거운 마음으로 목줄을 움켜쥐고 학교로 향하곤 했다. 마음과 달리 승리에 찬 표정으로 뒤를 졸졸 따라오는 염소를 보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녀석에 대한 성가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가위에 눌린 다음 날부터 귀찮기만 하던 녀석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시끄럽다고 구박했던 울음소리도 제법 들을 만했고, 못 마땅했던 시커먼 털색도 멋져 보였다. 그때부터 아침밥을 먹고 나면 별다른 소리 없이 염소의 목줄을 찾았다. 아버지는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모른 척하며 녀석을 잡고 대문을 빠져나왔다.



일요일이 되면 아침밥을 먹고 염소를 데리고 마을 뒤편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에 도착하면 목줄을 놓고 들판에 누웠다. 울음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나른하게 들렸다. 해가 뉘엿뉘엿 산자락으로 넘어갈 때면 염소를 데리고 언덕을 내려왔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염소는 포만감에 젖어 걸음이 느리기 그지없었다. 염소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가끔 마을 뒤편의 호수에 들렀다. 아버지는 위험하다며 혼자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녀석과 둘이라 두렵지 않았다.



잔잔한 호수에는 숲과 구름이 내려와 앉았다. 그 위에 저녁놀이 내려와 붉은색으로 덧칠을 했다. 바람이 붓을 들고 물결을 일으키면 호수에는 또 다른 풍경화가 만들어졌다. 저녁놀이 비친 호수에 반해 넋을 잃은 날 깨우는 것은 언제나 염소의 몫이었다. 어둠을 싫어했던 녀석은 어둠이 짙어지면 소리를 질러댔다. 염소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려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정 쌓기를 진행하던 중 이유 없이 염소가 죽었다. 그날은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 날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날 갑작스레 염소가 죽었다. 한참 울고 나자 마음 끝자락 저편에서 불안감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었다. '하필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염소가 죽다니. 어쩌면…….'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한 불길한 생각이 심장을 가만두지 않았다.



이윽고, 합격 발표를 보러 가셨던 아버지가 오셨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합격됐냐고 묻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염소가 죽었다는 말만 힘없이 내뱉었다. 아버지는 곧바로 염소에게로 다가갔다. 아버지의 침묵이 길어졌다. 불안감에 힘없이 늘어져있는 염소의 주검을 보며 속상함을 털어냈다.

‘네 탓이야. 네가 오늘 죽었기에 재수가 없어서 시험에 떨어진 거야.’

차갑게 식어버린 염소를 바라보면서 원망만 잔뜩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헛간에 누워 있는 염소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나를 쳐다보았다.

“염소는 또 기르면 된다. 합격했더구나. 장하다.”

아버지는 가만히 어깨를 토닥거렸다.


 

합격됐다는 소리가 믿어지지 않아 몇 번을 아버지에게 되물었다. 불합격 쪽으로 예측하고 있던 터라 합격 소식은 더없이 기뻤다. 터질듯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같이 시험 본 친구들의 합격 소식이 궁금해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친구들을 만나고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와 안방 문고리를 잡으려는 찰나,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어제 꿈자리가 좋질 않아 걱정했는데, 염소가 막내 액땜을 대신해 주었는가 봐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염소를 찾았다. 염소가 있던 자리에는 목줄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줄을 손에 쥐는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녀석과 나 사이에는 목줄만이 남아 있었다. 그 목줄은 영원히 내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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