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를 하느라 호박잎이 담겼던 접시를 씻어 엎어놓고는 접시의 뒷면의 검은 매직으로 그려진 하트를 보면서 또 가슴 한쪽이 까맣게 그을러 흑화가 되기 시작합니다. 언제쯤이면 이 자책이 멈출까 싶지만 내 발로 찾아가 어머머 예뻐라 손뼉을 치며 가져왔던 그릇인지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거 같기도 합니다.
검은 매직을 손톱으로 긁어봐도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차라리 다른 메이드 인 차이나 그릇들처럼 맑은 얼굴로 '나 중국산 맞아' 하며 커밍아웃을 하는 게 좋았을 텐데 이 가게의 주인장은 왜 검은 매직으로 메이드 인 차이나를 굳이 지우고 싶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이 날의 나들이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한참 인스타그램의 맛집, 멋집을 찾아다니며 혼자 나들이의 놀이를 즐기던 참이었던지라 그날도 무척이나 들떠 있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성수동은 인스타가 키워낸 최고의 핫 플레스이였으나 그곳은 젊은이들이나 즐기는 곳이라 여겨 한 번도 발걸음을 해 볼 시도조차 내지 않았던 동네였습니다. 내가 스무 살 때만 해도 그곳은 낡은 공장이 줄줄이 있던 삭막한 동네였었거든요. 그곳이 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나만 모르는 건가 싶었다가 인스타를 시작하고 나서야 인스타에 올라오는 피드들을 보면서 같이 마음이 붕 떠서 설레 했습니다. 성수동의 곳곳은 너도 나도 인스타에서 본 그 포즈 그대로 여기저기에서 찰칵찰칵 거리며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기 바빴습니다. 나도 질세라 그 들이 떠난 자리에서 혼자 셀카를 찍으며 놀다가 인스타에서 봐 둔 멋진 편집샵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빈 여백의 시간이 날 때마다 인스타의 성지를 구경하던 중에 발견한 성수동의 유명한 편집샵이었는데 가게의 멋들어진 대문 앞에서 그릇을 들고 사진을 찍은 수백 장의 인증사진을 보며 어린애처럼 꺄악~~ 소리를 지르며 꼭 가볼 거라며 가슴 설레하며 다짐을 했던 곳이었거든요.
프랑스 감성 물씬 풍기는 가게 안의 그릇들은 저를 더 흥분시켰던 거 같습니다. 다만 가격이 생각보다 많이 비쌌지만 저의 그 당시의 들뜬 기분으로 그릇 네 개에 20만 원이 넘는 가격을 카드로 삼 개월 할부를 긁고는 어찌나 신이 났던지 모릅니다. 집에 와서도 한참을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남편이 퇴근하며 들어오더니 내가 산 귀한 그릇을 보며 그러는 겁니다.
“정은아,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뭐야. 잘 좀 그리지 그랬어. 매직으로 죽죽 맘대로 선을 그어놨냐?”
순간 머릿속에서 에밀레종이 띵… 하고 울렸습니다. 남편에게 감성 파괴자라며 성질을 부리면서 이게 얼마나 유명한 인스타의 성지에서 사 온 전리품인지를 한참이나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래 놓고는 그날 저녁에 그 접시에 과일을 깎아 예쁘게 사진을 찍어 또 인스타에 올려 자랑을 실컷 해 두고 잠을 아주 달게도 잤던 기억이 납니다.
문제는 그다음 날부터 생기더라고요. 남편의 말 덕분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제 눈에 낀 눈꺼풀이 한 겹 벗겨지니 이 접시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같은 날 다른 편집샵에서 사 온 대 놓고 메이드 인 차이나라 쓰인 싸구려 그릇보다도 마감새가 너무 허술했습니다. 그릇의 뒷면에 매직으로 검게 칠한 부분을 형광등에 비춰보니 이 그릇 역시 메이드 인 차이나였던 것도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허세를 남발하더니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 들었답니다.
그릇을 쓸 때마다 뒷면의 검정 매직 하트가 거슬려서 마음이 아직도 쓰립니다. 적잖이 현타의 벼락을 맞은 저는 며칠을 고민하다가 인스타그램의 계정을 삭제했습니다.
나 역시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차에 무분별하게 거짓 동화되어서 남들이 박수를 치니 옆에서 따라 박수를 치며 아무것도 입지 않은 임금님의 차림이 너무 멋있다며 환호를 질러댄 관중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검정 매직의 메이드 인 차이나의 충격은 인스타 계정을 탈퇴하는 걸로도 모자라 또 한 가지의 후유증을 남겼는데요. 이젠 절대로 어디를 놀러 가더라도 인터넷에 소개된 맛집이나 블로그의 글을 찾아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절대로 절대로 안 찾아봅니다. 어제는 휴일이라 속초 여행을 다녀오기로하고 떠나면서 가서 먹고 싶은 음식과 가고 싶은 장소를 내가 진짜로 가 보고 싶고 먹고 싶은 걸로 생각해 내느라 꽤 고민을 하였지만 이젠 발길 닿는 데로 느끼고 내가 지나치다가 먹고 싶은 곳에서 정차해서 밥을 사 먹습니다.
오늘 점심은 어제 영월 시장에서 할머니가 파시던 조선호박잎을 밥솥에 쪄서 강된장을 끓여 먹었습니다. 널따란 그릇이 필요해서 그 검정 매직으로 덧칠해진 중국산 싸구려 감성 그릇을 꺼내서 처음 사용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그릇을 미워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그릇을 살 때의 경박하게 들떴던 그 순간의 나를 미워합니다.
귀하게 번 돈을 감성 마케팅에 속아 버린 느낌이 들어 아직도 분하지만 누가 시킨 게 아니고 내가 좋아서 내 흥에 속아 사들인 경박한 그릇이라 누굴 탓할 수도 없습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오래 저를 자책하게 할 거 같습니다. 우정을 뿌리칠 수 없어 친구 따라 도를 믿으십니까에 따라가서 제사비를 어이없이 뜯겼던 이십 년 전의 역대급 사건과 맞먹는 마음의 데미지가 생겼습니다. 사기를 당한 기분이지만 이건 누가 나를 대놓고 기망하려는 행위가 없는 자승자박의 바보같은 지출이었던게 맞습니다.
오늘은 저 그릇 뒤의 뒷면의 검정 매직을 어떻게 지울지를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기필코 가짜 감성의 얼굴을 벗겨버리고 맨 얼굴의 본연의 그릇의 가치를 마주하고 싶어 집니다. 그릇이 나쁜게 아닙니다. 들떴던 제가 나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