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문학세상 신춘문예 당선작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어느 겨울날 부모님께서는 땅 끝 마을인 해남에서 서울까지 2주 동안 국토 종단 캠프에 참여시켰다.
90년대 중반에는 국토종단과 국토횡단 걷기 캠프가 유행이었다. 여름철에는 동해에서부터 태백산맥을 넘어 서울로 오는 국토 횡단 캠프가 있었고 눈바람을 뚫어야 하는 추운 겨울에는 해남의 땅 끝 마을에서부터 서울까지 올라와야 하는 국토 종단 캠프가 있었다.
나는 캠프에 입소하기 위해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가족들과 헤어지고 전세 버스를 타고 해남에 도착하였다.
그때 캠프의 총책임자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라서 그런지 상냥하게 대하며 우리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를 실은 버스가 해남에 도착하자마자 그렇게 상냥했던 대장과 소대장들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바꾸더니 군기를 잡으며 오리걸음을 시키기 시작했다. 3일 동안은 그렇게 군기를 잡았다.
그것은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군대식 통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서러운 마음이 들어 눈물을 흘리며 캠프에 보낸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겨울 캠프라 전체 참가자 중에 여성 대원은 단 1명이었다. 대부분이 남자들이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보니 어린 나이였는데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2주 동안 입을 옷과 속옷가지들을 한 가방에 다 넣고 다니는 것이 어려워서 1주일 분량의 짐만 메고 나머지 1주일 분량은 캠프 본부 트럭에 넣도록 하였다.
캠프가 진행될 때는 마치 군대를 연상시키는 듯 1개 소대를 마흔명씩 편성하고 각소대마다 대학생 소대장을 두었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들로 구성된 소대의 분대장은 나이가 가장 많은 고등학생 중에서 선출하였다.
그날 이후부터 두 개 소대가 2주일 동안 아침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국도를 걸었다. 해가 질 때면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캠프를 꾸렸다. 가끔씩 운이 좋은 날에는 동네 어르신들의 배려로 보일러가 설치된 마을회관 방에서 잘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조금 커 보이는 침낭이 달린 가방을 메고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고 졸졸 쫓아 다니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도시락을 먹었다.
우리는 행군이 끝나고 학교 운동장에 도착하게 되면 저녁을 먹을 때까지 축구 시합을 하곤 했다.
첫 시합 후 소대장은 나에게 ‘차범근’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다른 한 명에게는 ‘슛돌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때는 ‘차범근’ 보다는 ‘슛돌이’라는 별명이 더 좋아 보였다.
딱 1주가 지난 날 전라북도 정읍에서 새로운 가방을 받았다. 새로운 가방을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 어머니의 편지가 있었다.
나는 양면 괘지에 볼펜으로 쓰인 어머니 특유의 글씨체를 본 순간, 한 주간 가졌던 모진 서러움과 야속함에도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감정들과 섞여 펑펑 울고 말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나처럼 편지지를 손에 들고 울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부모님이 정읍까지 오셔서 멀리서 우리가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셨다고 한다.
국토종단은 해남에서부터 서울 여의도까지 2주간 걸어가는 것이었는데 기상이 악화되어 계획만큼 속도가 나지 않아 결국 논산까지밖에 걸어가지 못했다.
논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린 후 최종 도착지점인 여의도까지 걸어갔더니 그곳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나는 가족을 떠나 홀로 태평양을 건너 유학을 왔다. 그리고는 17년이 넘는 시간을 혼자 타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 혼자 이곳에서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회상하다 보면 이제 20년도 훌쩍 넘은 그 추운 겨울날 내 조국 대한민국을 걸었던 그 시간이 떠올려지곤 했다.
그동안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스스로 찾아가며 걸어왔다. 그 당시에는 눈과 비바람에 속도가 지체되더라도 누군가가 정해 준 목적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살아온 17년은 스스로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내게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나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7년이라는 인생의 행군 가운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다.
유학과 이민의 나라에 살다 보니 이곳에서 공부하고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많은 경험과 교훈을 얻었다.
부모님께서는 지난 17년 동안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았지만 항상 나의 걸음에 동행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많이 발달하기 전이던 유학 초기에는 내 방에 팩시밀리가 한 대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양면 괘지에 편지를 써서 팩스로 편지를 보내곤 했다. 이메일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 후에는 매일같이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냈다. 이제는 핸드폰 메신저로 음성 통화도 한다.
나 혼자서 걸어왔다고 생각하는 지난 삶을 뒤돌아보면 내 길 위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들의 발자국들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며 걸어가고 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까지 함께 걸어왔던 동행자들을 생각해보았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이나 행복하게 해준 사람들도 모두가 훌륭한 동행자들이었다.
나는 삼십 년이 넘게 혼자 걷기를 하다가 좋은 짝꿍을 만나 행복을 가꾸고 있다. 앞으로는 궂은일이나 좋은일이나 함께 할 것을 생각하니 설렘이 가득해진다.
나는 지금까지는 어떤 발자국을 남겨 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모두에게 좋은 동행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리라 다짐해 본다. 앞으로도 좋은 동행이 되기 위해 짝꿍과 함께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꿈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