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만나는 반가운 먹거리들
며칠 전, 집 앞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과일코너에 놓인 홍시를 봤다. 스위스의 가을이 깊어간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홍시를 처음 발견한 건 8년 전, 스위스에 정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진열대에 낯익은 과일이 있어 자세히 보니, 어라? 홍시가 아닌가. 보통 감도 아니고, 찰박한 껍질 속에 말랑한 과육을 잔뜩 머금은, 장금이가 아니더라도 한국사람이라면 단박에 알아볼 진짜 홍시였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사와서 동생에게 여기도 홍시 판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스위스에서도 홍시를 먹냐'면서 같이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홍시의 경우처럼, 이곳에서 만나는 뜻밖의 친숙한 먹거리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감
전래동화와 추석 명절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탓일까. 감을 '지극히 한국적인 과일'이라 여기며 살았기에, 이곳에서도 가을에 감을 먹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살짝 인지부조화가 왔었다. 다만, 호랑이가 살지 않는 스위스인지라(!) 곶감은 없고 단감과 홍시만 있다. 단감은 주로 이탈리아에서, 홍시는 스페인에서 수입하는 듯하다. 이곳 단감은 신기하게 씨가 없고, 껍질이 우리나라 단감보다 훨씬 얇아서 껍질 째 먹어도 떫지 않다. 홍시는 한국에서 먹는 홍시 맛과 비슷하고, 냉장고에 살짝 얼려 먹기 좋게 작은 크기와 보드라운 질감을 갖고 있다. 감은 한국인인 내게 무척 반가운 과일이지만 이곳에서는 호불호가 크게 나뉘는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은 자주 사먹고, 안먹는 사람은 아예 안먹는 성향이 강하다. 스위스 사람들이 곶감 맛을 모르는 게 다행이다.
느타리버섯
스위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에선 양송이와 송로버섯만 먹는 줄 알았는데, 이곳 사람들도 느타리를 먹는다. 사실 이곳에서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버섯 종류는 한국보다 훨씬 다양하다. 버섯 채집과 기르기가 취미인 유럽 사람이 엄청 많은 탓일게다(한때 미남으로 유명했던 이탈리아 축구선수 필리포 인자기 취미도 버섯 채집). 며칠 전 남편 직장 동료는 자기가 직접 길렀다면서 말린 버섯 3종세트와 생전 처음 보는 '분홍색 느타리버섯'을 선물해 주었다.
슈퍼마켓 냉장코너에서 언제든 살 수 있는 흔한 식재료라, 반찬 궁할 때 사다가 후다닥 버섯 두루치기 해서 한 끼 해결하기 좋다. 이곳 사람들은 밀가루옷을 입혀 튀겨먹거나 (언제나 그렇듯)파스타에 넣어 먹는다.
순두부
두부, 특히 모두부는 이곳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표적 채식 식재료다. 다만 우리나라보다 종류가 적고, 식감이 훨씬 딱딱해서 혹자는 '지우개 먹는 느낌'이라 말하기도 한다.
순두부는 모두부보다 늦게 이곳 시장에 출현했다. 그래서인지 모두부에 비해 흔하지는 않은 편이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에서 처음 순두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순두부는 독일어로 '자이덴토푸Seidentofu(실크두부)'라 불리고, 우리나라의 떠먹는 모닝두부와 맛과 식감이 비슷하다. 이곳 사람들은 이 순두부를 어떤 방식으로 요리해 먹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인인 나는 순두부 위에 참기름을 듬뿍 넣은 간장양념장을 부어 먹는다. 이 맛있는 간장양념장의 존재를 모르고 귀한 순두부를 샐러드나 파스타 따위에 얹어 먹을 이곳 사람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찹쌀떡 아이스크림
어린 시절 비싼 빙과류에 속했던 찰떡 아이스가 스위스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물론 찰떡 아이스라는 이름은 아니고, 일본식 찹쌀떡인 모찌를 이용해서 '모찌 아이스Mochi Eis'로 통용된다. 스위스 사람들이 예전부터 즐겨 먹던 아이템은 아니지만 일본 음식을 힙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의 입맛에 맞추어 아시아 식당의 디저트로 인기를 끌면서 인지도를 높인 것 같다. 수요가 꽤 높은지 동네 슈퍼마켓에도 진출, 이제 냉동진열대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아이템이 됐다. 초코, 커피, 바닐라, 망고, 녹차 등 맛도 다양하다. 가끔 떡의 식감이 그리울 때 하나씩 사먹기 좋다.
명이나물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명이나물을 먹는 나라가 한국 뿐이라고 믿고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나도 이곳에 오기 전까진 몰랐다, 스위스에서 명이를 보게 될 줄... 봄이 되면 지천에 명이가 자라서 따가는 사람이 임자다.
몇 년 전 이곳 숲에서 명이를 한가득 따서 명이나물 장아찌를 만들어 시어머니께 드린 적이 있는데, 너무너무 맛있게 드셨다면서 레서피를 물어오셨다. 그도 그럴것이, 이곳에선 명이를 (역시나 또)파스타나 페스토로만 먹기 때문에 장아찌 형태의 명이는 시어머니께 센세이션이었을 것이다.
아래 사진과 같은 명이 파스타는 봄철에만 잠깐 나오는 시즌 한정판이다. 일반 파스타 같은 식감에 명이 특유의 마늘맛이 느껴진다. 나쁘지 않은 맛이지만 왜 이곳 사람들은 음식에 관한 창의력을 더 갈고닦지 못하고 모든 식재료를 파스타로 한정하는지, 쩝쩝박사들의 나라 한국에서 온 나는 심히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치
여기서 말하는 김치는 한인마트에서 파는 한국 상표(예를 들어 종갓집이나 비비고)의 김치가 아닌 '스위스 회사가 만드는 스위스화된 김치'를 말한다. 한국이라면 김정은밖에 모르는 스위스 사람들 사이에서도 김치는 웰빙푸드로 나름 유명세를 탄 모양인지, 슈퍼마켓에서 스위스화된 김치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김치 원조국 출신인 나는 스위스화된 김치를 맛보기가 두려워(?) 사먹지 않았다. 매운 걸 못먹는 이곳 사람들 입맛에 맞추어 고춧가루를 적게 넣은 허여멀건한 때깔이 영 못미덥다. 비건을 겨냥한 제품이기 때문에 당연히 새우젓도 들어가지 않았다. 딱 봐도 굉장히 맛이 없어 보이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이곳 사람들이 호기심에 사먹었다가 김치 그 자체에 잘못된 인식을 가질까봐 걱정이다. 모든 재료를 파스타로 한정하는 빈곤한 창의력은 왜 하필 김치에서만 꽃피우는지, 난 평생 먹어본 적도 없는 '비트 김치', '호박 김치'까지 출시해서
보는 한국인을 당황케 한다.
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아 음식 맛없기로 영국과 별 다를 바 없는 스위스지만, 이렇게 뜻밖의 친숙한 먹거리들을 찾는 재미라도 있어 다행이다. 앞으로 또 어떤 반가운 식재료들을 마주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