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이 영화가 되는 순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19년 영화 [아이리시맨]은 세시간 30분 가까운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긴 영화다. 상영시간이 ‘길다’라는 묘사가 이 영화의 핵심에 맞닿아 있기에 흥미로운 영화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넷플릭스 영화 - 휴대폰으로 딴 짓을 하면서 곁눈질로 보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오는 동안 잠시 멈추어 두기도 하는 등 - 와는 다르게 그 긴 상영시간동안 오롯이 영화의 세계를 체험하며 바깥세상을 잊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신비로운 영화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형식적으로 단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영화이기도 한데, 바로 그러한 특성때문에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한계까지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를 위한 영화라는 생각까지 들게 하는 작품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하고 있듯,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2019년에 만들었다는 점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데, [어벤저스] 시리즈를 두고 “영화(cinema)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스콜세지가 지금까지 80년 가까이 쌓아올린 ‘영화’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전시되어 있다. 물론 나는 그가 믿는 영화(cinema)와 [어벤저스] 시리즈가 만들고자 하는 영화(movie)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극장의 스크린에 걸리거나 넷플릭스 등의 사업자를 통해 안방 TV로 배달되는 영상매체라는 속성은 동일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산업 내에서 이익창출을 위해 탄생한 상품으로서의 영화와 비상업적인 목적 하에 음악-미술-음향-의상 등 모든 종류의 현대예술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종합예술로서의 영화는 분명 그 뿌리를 달리한다. [아이리시맨]은 스콜세지와 그의 오랜 친구들이 믿어온 예술로서의 영화가 어떻게 지금까지도 굳건히 버텨낼 수 있는가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가 살아온 한 시대를 아름답게 종결하는, 위대한 결과물이다.
[아이리시맨]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앉아 하루종일 이 영화에 대해 떠들고 싶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순간, 모든 컷, 모든 씬, 배우의 표정 하나까지 보물같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스콜세지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에 대한 관대함, 여성 캐릭터의 의도적인 배제, 혹은 도구로서 존재하는 여성 캐릭터,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장면구성과 클로즈업의 빈번한 사용 등이 나의 구매욕구를 떨어뜨려왔다) 마피아영화나 갱스터영화는 한국의 조폭영화와 함께 가장 진부한 장르로 생각하는 편식적인 영화취향 탓에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한시간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두 시간 반 가까운 시간동안 인물을 차근차근 소개하고 인물 간 관계를 충실히 설명하며 ‘빌드업’해온 영화가 갑자기 영화적 리듬, 혹은 호흡을 확 떨어뜨리며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 분)의 눈동자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것임을 직감할 수 있으며, 그 심상치 않은 일이란 역사적으로 이미 발생한,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로 사건이다. 흥겨운 스윙재즈풍의 노래들과 마피아들의 떠들썩한 수다로 가득 채워졌던 영화가 디트로이트 교외의 한적한 모텔을 배경으로 등장인물에게 무거운 침묵을 툭 던져주었을 때부터 우리는 이 영화적 세계가 완성단계에 다다랐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마무리되는 과정은 ‘이것이 대가의 솜씨구나’라는 탄성이 나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이 한 시간은 비단 이 영화 안에서 창조된 세계가 마무리되는 한 시간이 아니라, 프랭크가 회고하는 프랭크와 러셀, 지미 등 주요인물이 경험해온 몇십년의 세월이 마무리되는 시간이기도 하며, 그들이 겪어온 세월이란 감독 스콜세지가 경험한 지난 몇십년 간의 영화의 역사를 은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시간으로 추정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먼저 70세를 훌쩍 넘긴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 등이 컴퓨터의 힘을 빌어 40대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흥미롭다고 하기엔 애처로운 감정부터 불러 일으킨다. 얼굴은 디에이징(de-aging)할 수 있을지 몰라도 배우들의 육체는 여전히 노년 그대로이기에 액션씬에서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데,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자신의 [필름클럽] 팟캐스트에서 이조차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영화의 대주제로 설정한다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부분일 뿐 아니라 이 대배우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관객으로 하여금 독특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수단이라며 옹호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스콜세지가 드 니로, 파치노, 페시 등과 함께 실화를 배경으로 한 마피아영화를 만든다’는 문구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이 문구에 세시간 30분의 상영시간과 넷플릭스라는 배급사 정보까지 더해지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지루함과 진부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콜세지가 만든 이 영화가 위대한 이유는 이와 같은 영화 외적인 피상성을 오로지 영화 내부의 완성도만으로 극복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동일한 배우가 몇십년에 걸쳐 한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냄으로써 이 영화가 단지 지미 호파라는 한 시대를 풍미한 실존인물에 관한 흥미로운 서사시에 그치지 않고 영화 그 자체의 역사, 혹은 필름메이킹이라는 작업과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아우르는 거대한 담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대주제를 ‘시간’으로 본다면 프랭크의 딸 페기(안나 파퀸 분)의 존재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페기는 폭력을 도구 삼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와의 관계를 서서히 끊어나가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속한 폭력의 세계를 그저 바라만 볼 뿐 그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중에는 대화마저 단절하며 프랭크의 세계에서 완전히 떠나버린다. 페기 캐릭터가 갖는 이와 같은 속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게 한다. 예컨대 신이나 천사같은 존재 말이다. 이들은 인간이 갖는 유한성, 즉 시간으로 상징되는 한계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프랭크와 러셀(조 페시 분), 지미(알 파치노 분)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분투하는 동안(영화의 메인 시제, 즉 프랭크와 러셀 부부의 자동차 여행기간 동안 러셀과 프랭크는 많은 곳에 들려 수금을 한다. 지미 역시 출소 후 노조 위원장 자리를 되찾기 위해 생명에 대한 위협까지 무시하며 이곳 저곳을 들쑤신다. 노인이 된 ‘현재’까지도 이들은 몇 푼의 돈과 알량한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페기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이들이 흘려보내는 시간을 가만히 주워담는다. 어쩌면 스콜세지 감독이 도달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바로 신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흥미로운 상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고 해서 이 영화에 단점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에서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폭력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은 이 영화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주인공 프랭크는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부여받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가 아무리 폭력과 비양심의 시대라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며 승승장구해온 그에게 영화 막바지 - 아주, 너무나 인간적인 - 회한의 감정을 극적으로 부여하는 것은 미묘한 불편함을 발생시킨다. 현실을 뒤튼 블랙코메디라고 하기에는 그의 감정적 동요가 영화 안에서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다.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부분적이고 주변적이며 한계적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페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여성도 다층적인 차원에서 그려지지 않는데, 이건 스콜세지가 세 주인공에게 거의 모든 영화적 에너지를 쏟아붓기 위해 선택한 의도적 무시라고 백번 이해한다 해도 너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영화 내에서 완벽하게 여성적인 색깔이 지워져 있다. 물론 이런 단점은 영화 전체적인 맥락에서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정도로 단편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이 영화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다거나 ‘올해의 영화’로 선택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아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시맨]은 여전히 매우 좋은 영화다. 이건 확실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