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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나페홀로 Apr 08. 2022

이준석, '인간 내면의 악'에 호소하는 정치의 비열함

 연일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의 마우스에 언론이 집중하고 있다. 


 이준석은 '합리성'을 가장한 '인간 내면의 악'에 호소하는 비열한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얼핏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뭔가 틀리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그의 발언 자체 내에서는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최대다수의 최대불편'을 야기하는 '전장연의 시위의 방식이 문제다' 라는 그의 발언에 

상당히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합리적'이라고 해서 '정의'로운 것이 아니며,

'합리적'이라고 해서 '옳은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이준석의 논법은 철저히 세속화된 벤담의 '공리주의' 를 따라가는데, 

이는 '효율주의'라고 명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효율성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인권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의 가장 큰 단점이 

어떤 때는 효율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준석의 입에서 당당하게 '최대다수의 최대불편'을 일으키는 

소수 전장연의 시위가 '잘못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나는 국민의힘 이준석의 입을 통해서 

한국 보수의 집권전략의 초조함을 읽는다. 


이미 한국 정치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은 

한국 보수진영의 집권전략은 수십년 간 '반공주의' 였다는 점이다. 

즉 그 간의 한국 보수진영은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승의 전략이

'외부의 적' , 내부를 동일화시키기 위한 기폭제로 '공공의 적'을 만들어서 적대시 하는 '증오의 전략'이었다.

김정일, 김정은 세습체제가 당연히 문제가 있는 것은 맞지만 

최소한 80년대까지 태어난 국민들은 북한을 실제 이상의 더 큰 악으로 배우고 

최대의 숙적으로 인식해왔다.  그래서 선거철만 되면 절대적 '외부의 악'인 북한을 대상으로 

보수진영에 표를 던지는 공포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갔었다. 


하지만, 시대는 흐르게 되어있고,

이제는 한국의 보수진영의 최대, 최적의 전략인 '외부의 적'을 적대시하는 전략이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언급하지만 80년대생이 끝이자 새로운 세대일 것이다. 반공주의가 이제 먹히지 않는 세대.

불과 며칠 전에 북한이 ICBM을 쐈다고 해도 

내가 가르치는 20대 학생들은 그 뉴스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알았다고 해도 '며칠전에도 쏘지 않았나요?'식의 반응이 나온다. 

이것이 잘못된 반응일까? 아니다. 

이미 새로운 세대들은 '반공주의'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북한이 무슨 도발을 해도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을거라 몸으로 알고 있기에

이제 보수의 '반공주의',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를 단속'하는 전략은 완전히 막혔다.


이런 시대에 

내가 파악한 한국 보수의 집권전략은 더 악랄한 방법을 택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가 된다.

사실 '외부의 적'을 허상에 가깝게 강화시키는 전략이 결국 세계평화에는 걸림돌이 되듯이 (우리 국민만 

뭉칠 수 있다면 외부 타국가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이기적 전략의 문제) 

이제는 그들은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외부의 적'이 허상임이 드러나자 

'내부의 적'을 만들어서 국가 안에서 서로 증오하게 만드는 이 정치의 방식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을까?

집권만 할 수 있다면 국민 간의 분열과 증오가 치솟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한 그들의 정치를 나는 지지할 수가 없다.


이준석의 행보를 보라.

그가 정치사에 있어서 언론의 최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들은 

항상 내부의 적을 형성하는 거침없는 발언에서 나왔다. 


한국사회의 반여성주의를 형성케하여 20대 남성의 피해의식을 부추겨서 전선을 만들어 낸 

그 당사자가 바로 이준석이다. 

실제로 현실의 20대를 관찰해보라,

남녀가 서로 만나서 사랑하기에도 바쁜 나이다. 실제의 삶도 그렇게 이어진다.

그런데 정치와 언론이 만나서 

20대 남녀가 원래부터 원수였던 것 처럼 선을 긋는다. 

한국이 남성우월주의 사회임이 여전히 확실함에도 

이제서야 여성의 권리를 찾아가는 시대적 변화속에서 

이준석의 보수세력은 20대 남성들의 마음 속 '악'에 문을 두드린다. 

'너도 억울하지 않냐, 너도 피해보지 않냐, 여성 때문에 너의 길이 막히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처지의 문제가 있을때 합리화하고 싶어하고, 정당화하고 싶어하는데 

그 심리가 항시 누구의 탓, 누군가의 잘못으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현재 20대의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20대 남성이 20대 여성에게 향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득권을 잡고 놓지 않고 있는 50대 이상의 기성세대에게 향해야 올바른 것이다. 

아마도 그 기득권의 주된 세력이 보수진영에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한국의 보수정치는 일거양득을 실현한 셈이다. 

자신들에게 향했어야할 20대의 분노의 화살을, 그들(20대) 내부로 향하게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마치 20대 여성을 전부 극렬한 페미니즘으로 둔갑시켜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진보세력이니 진보를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이분법의 프레임 형성에 성공한 셈이다.


이준석의 발언은 

보편적 인간의 내면의 '악'에 호소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에 있어서도 

사실 불편하지 않은 시민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누군가는 불만을 터뜨리고 싶어할 것이다. 

장애인 시위에 대해 애초에 동의하지 않은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있어서 대놓고, 공중을 향해 불만을 표하거나 반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눈치'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런 불편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어린아이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때 성인들이 아이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행위에 대해서

심리적으로 불만이 있는 성인도 있을 수 있다. '나도 다리 아프다. 오히려 나는 하루종일 일하다가 이제 자리에 앉고 싶은데 어리다는 이유로 내가 왜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라며 심리적인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걸 대놓고 표현하는 성인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설령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해도 그걸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에 우리 인간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이동권이 제약된 장애인들을 위해 비장애인들이 배려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성인이라면 상식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불만이 있더라도 그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설령 흘려듣더라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게 어른이다. 


그런데 이준석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금기의 발언을 '국민의힘' 거대야당, 아니 이제 여당 대표로써 공적 발언을 던저버린 셈이다. 그의 발언은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게 직책의 힘이다. 그는 한낮 철부지 어린애가 아닌데 정작 본인은 어린애처럼 철없는 말을 던진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가 노약자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부모를 보고, '엄마 왜 자리를 비켜줘? 엄마가 앉아! '라고 말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생각말이다.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내뱉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의 증진이다. 

그러나 이준석은 오히려 보수집권전략의 수단으로 '내부의 적'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미 이준석의 공적발언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은 '전장연'을 집단이기주의라 비난한다. 

장애인 전부가 문제가 아니고, 전장연이라는 집단이 문제라고 비판하지만 비겁한 합리화의 전형이다. 

시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방법이 문제라고 하지만 이 또한 비겁하다. 

이미 장애인분들은 모든 방법을 다 해보고 안되었기 최후의 수단으로 지금의 시위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원래 '악'은 '선'보다 항상 빠르게 번식하는 습성이 있다. 

이준석이 부채질한 '악'의 씨는 이미 빠르게 퍼지고 있고, 평소 억눌러왔던 내면의 악에 조응하면서 

증오를 장애인들에게 쏟아내는 시민들이 들풀처럼 커진다. 


어디까지 '내부의 적'을 만드는 비열한 정치가 이어질 것인지 아찔하기만 하다. 

대체 우리는 어디까지 타락할 것인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정치권력을 잡아야 하는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장애인의 이동권을 끝까지 빼앗아야 하겠는가. 

정녕 같은 국민으로써 동등하게 누려야할 권리가 있다는 명백한 사실에 

눈을 감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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