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박사의 다양성 칼럼
문화 다양성을 이야기할 때, 보통 표면수준(Surface level)과 가치수준(Deep level)으로 분류한다. 표면수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구통계학적 개념의 다양성이고, 가치수준은 주로 인간 내면의 다양성, 즉 가치, 태도, 신념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문화 다양성은 인구통계학적 다양성을 포함하여 정신적 능력이나 태도, 가치 등을 포괄하는 다양성이다(Stahl, G. K., Maznevski, M. L., Voigt, A., & Jonsen, K. (2009), Unraveling the effects of cultural diversity in teams: a meta-analysis of research on multicultural work groups,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Studies, 41, 690-709).
다양성에 정통한 연구 학자인 로빈 엘리(Robin J. Ely)와 데이비드 토마스(David A. Thomas) 교수는 문화 다양성이 집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몇 가지 관점으로 정의했다. 첫째는 차별과 공평의 관점(Discrimination-and-Fairness Perspective)으로, 집단 내 모든 사람이 정의에 근거하여 공평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나 단체에서 특정 소수그룹에 대한 차별과 편파적인 태도를 없애고, 채용이나 승진 등에서 균등한 기회 제공을 원칙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접근과 합리성의 관점(Access-and-Legitimacy Perspective)으로,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속한 산업의 시장과 고객, 이해관계자들이 다양하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기업을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하여 다양한 시장과 고객에 접근하여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통합과 학습의 관점(Integration-and-Learning Perspective)으로, 집단 내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가치 있는 자원으로 생각하고, 서로 간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경험을 통해 학습을 촉진한다는 관점을 말한다. 그래서 다양성을 기업의 주요 업무 프로세스와 연결하고 창의적 변화를 일으켜서 지속적인 학습효과의 선순환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Ely, R. J., & Thomas, D. A. (2001), Cultural diversity at work: The effect of diversity perspectives on work group processes and outcomes,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46, 229-273).
이렇듯 문화 다양성은 우리 사회와 경제 환경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면서, 우리가 말하는 정의로운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수준과 가치를 높이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몇 가지 에피소드들은 우리의 삶 속에 녹아있는 문화 다양성의 문제와 다양성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실리콘 밸리의 다양성
현재 실리콘밸리에 살면서, 인사 및 다양성 전문가로 활약 중인 어느 박사님이 경험했던 이야기다(Diversitas 6호(2020), 박은연, 고려대학교 다양성 위원회). 아이가 다니던 실리콘밸리의 스페인어 유아원에서 부모들을 초대해 가족의 날 행사를 하는데, 한 백인 미국인 엄마가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을 휘휘 저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I am so ashamed that my kid is the only mono-lingual!" 번역하면
"우리 아이는 한나라 말밖에 못 해서 정말 창피해요!"
그 박사님의 아이만 해도, 누가 "너는 몇 나라말을 하니?"라고 물어보면, 자랑스럽게 손가락 네 개를 척 올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뿌듯한 얼굴로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와 일본어요."라고 답한다. 아이는 실제로 스페인어를 영어보다 더 잘하고 한국어도 꽤 알아들으면서, 자기가 꼭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한국말을 시도한다고 한다. 다만 네 번째 언어인 일본어는, 아기 때부터 아빠가 불러준 일본어 자장가 정도만 안다고 한다.
혁신이라면 최고라고 알려진 실리콘밸리에서, 왜 이렇게 여러 나라말을 하는 것이 애들에게 자랑거리일까? 그것은 다양한 언어를 하는 것이 다양한 사고와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면, 소위 말하는 'Mono-lingual'이 되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밸리가 지속적 혁신의 비결로서 다양성을 바라보는 단면이다. 그러면 왜 실리콘밸리에서는 다양성이 중요시되고 있을까? 다양성이 바로 글로벌 시장에서 기업이 생존하고, 지속해서 혁신, 성장하기 위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리콘밸리에서 이야기하는 다양성은 무엇일까? 다양성에는 많은 속성이 있으며, 이 중에서 '인종, 성별, 성 지향성, 혼인 상태, 연령, 장애 여부, 출신 국가, 종교 등'이 캘리포니아주 법으로 적극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
원숭이와 판다 그리고 바나나
언젠가 동국대 성상현 교수님의 칼럼에서 다양성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비빔밥의 리더(2011), 성상현, HR Column).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를 살펴보는 재미있는 설문 사례다. 질문 내용은 간단하다. 동양인 그룹과 서양인 그룹에 '원숭이와 판다, 바나나 중에서 서로 관련된 것 두 개를 고르시오'이다. 설문 결과, 동양인 그룹은 대부분 원숭이와 바나나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양인 그룹은 원숭이와 판다를 골랐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것은 동양인은 서로의 관계를 중시하는, 즉 관계 중심적 사고를 한다. 반면에 서양인은 공통적 속성을 중시하는, 즉 속성 중심적 사고를 한다. 그래서 포유류라는 공통점을 먼저 본 것이다. 이렇듯 동양인과 서양인은 중심적인 사고가 다르다.
같은 칼럼에서 언급한 전통 초상화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동양인의 초상화는 인물뿐 아니라 지위나 계급을 알아보는 옷차림과 액세서리에도 신경을 쓴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의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에 서양인의 초상화는 인물 자체의 모습과 특징에만 충실하다. 독자들도 한번 확인해 보라. 누가 원숭이와 바나나를 선택했든, 원숭이와 판다를 선택했든 간에 둘 다 답이다. 또한 초상화가 인물만을 중심으로 하든, 배경을 중시하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문화가 다를 뿐이다.
기업의 활동 영역이 글로벌 시장으로 확대되면서 주변에 외국인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동료 한국인들이 언어나 생활방식 등에서의 어려움을 알고 대체로 배려를 잘해준다고 한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는 쉽게 잘 파악하고 이해해 주면서 도와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의 차이, 즉 보이지 않는 생각의 차이로 많은 갈등을 겪는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전에 주로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직업 특성상 많은 외국인과 일해야 했고, 다양한 국적, 문화, 종교, 인종의 친구들과 교류해 왔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우리 고객이나 파트너와 미팅하면 흔히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직 속에 만연해 있는 획일성과 계급의식이다. 때로는 막무가내식의 요구를 하면서 다른 기업들과 비교하는 소위 '갑질'을 하는 모양새나, 엄격한 상하 관계로 인한 비효율적인 업무 진행 등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온 친구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이제 단순히 사고의 차이로만 보기보다 한 번쯤은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자. 흑백논리 중심의 사고가 관계 중심의 사고로 둔갑한 것이 아닌지, 편협한 획일성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주장하고 있는지 말이다.
물론 관계 중심적 사고 자체는 중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관계를 중시하면 독이 될 수도 있다. 남성과 여성, 신세대와 구세대, 학연과 지연 등 많은 사조직과 사모임이 생기고, 때로는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도 생긴다. 오래전에 회식 자리에서 건배사로 유행했던 말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것은 '우리가 남이가?'라고 선창하면, 전체가 '아니오!'를 연호한다. 이 말뜻 안에 뭔지 모르는 배타성이 묻어있다.
Caucasian only?
수년 전에 TV 방송의 뉴스를 보고 어이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영어 학원 강사를 모집하는데 버젓이 자격요건에 'Caucasian only(백인만 지원 가능)'라는 내용의 광고를 공개적으로 냈단다. 미국이나 일부 유럽 국가에서 이런 행위는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나 긍정적 조치(Positive Action)에 위배되어 형사 처분까지 받을 수 있는 엄중한 사항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더욱더 가관이다. 수강하는 어린 학생들이 무서워해서 부모들이 학원에 건의했단다. 자기 아이가 검은색 피부에 눈만 반짝반짝 보이는 선생님이 섬뜩해서 옆에 가까이 가기도 꺼린다는 것이다.
한국에 온 지 8년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레지널스씨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여러 학원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채용에서 탈락했다. 학원 측에 그 이유를 물어보니 답변은 '흑인이라서' 또는 그냥 '이유 없음'이었다. 이 또한 일부 국가에서는 인종차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는 행위다. 이런 행태들이 교육의 중심지라 불리는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한편 그 무지함이 두렵기까지 하다. 어린 학생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잘못된 편견이 자라면서 본인 자신과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한국의 영어 학원가에는 뚜렷한 인종 계급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백인 여성이고 두 번째는 백인 남성이다. 그다음은 아시안 계 여성 등등. 뉴스의 기자는 당시 전국 영어학원에 약 3,300여 명의 원어민 강사가 있다고 전했다. 순간 얼마 전 뉴스 기사가 떠올랐다. 어떤 백인 성범죄자가 한국으로 피신해와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가 붙잡혔다는 기사였다. 정작 자격도 안 되는 성범죄자를 먼저 가려내야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상식이다.
차이와 차별
다음은 어느 인터넷 포탈에 나왔던 사례다(차이와 차별은 어떻게 달라요(2011), 네이버 지식백과).
어느 학교의 한 남학생이 씩씩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청소 시간에 선생님 때문에 좀 화가 났어요. 선생님께서 책상 같은 무거운 물건은 모두 남학생한테만 옮기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께 이거 남녀 차별 아니냐고 얘기했더니 '이건 차별이 아니야. 남녀 차이를 고려하는 거지'라고 하셨어요. 아니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고요? 차별이나 차이나 그게 그 말 아닌가요?"
출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이를 틀린 것으로 생각할 때 차별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 두 단어는 발음상으로 비슷해 보이지만 그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마치 히틀러가 이 같은 생각으로 인류 역사상 엄청난 비극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차이와 차별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지하철역마다 설치된 리프트, 육교에 설치된 엘리베이터, 출입구에 가까운 장애인 전용 주차장 등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한 시설이다. 반면에 피부색이 짙다고 고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주거나 일과 전혀 상관없는 용모로 평가하는 것, 똑같은 일을 하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급여를 적게 주는 것 등은 엄연한 차별이다.
문제는 서로의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매일 보는 정치권에서 정당 간의 당파싸움이 그렇고, 기업의 가치사슬 내에 이해관계자들의 역학적 차이를 설정하여 갑을 관계로 규정하는 것도 그렇다. 또한 사회적으로 보수와 진보가 양분되어 대립을 위한 대립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양성 관리의 전문가이신 성상현 교수님은 차이와 차별을 '양날의 칼'과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배경과 자라온 환경이 서로 다른 사람들은 사건과 사물을 보는 시각과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차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고집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면 그것은 차별이 된다. 그러나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유로운 소통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곧 창조적 발전과 혁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장이 서로 다른 동력들에 의해 자유로이 움직이듯이, 조직은 차이에 대한 존중과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발전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면 좋겠다.
결론
앞에서 몇 가지 문화 다양성의 에피소드를 살펴보면서, 실리콘밸리의 다양성이나 동, 서양인의 차이, 그리고 차이와 차별 문제 등을 짚어보았다. 우리의 교육이나 사회 현장에서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단합이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동질성만을 강조해 왔는지도 알았다. 바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오래된 우리 의식의 문제이고,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우리 교육의 문제였다. 결코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교육 현장에서, 기업에서, 정치권에서 천천히 문화 다양성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