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머니는 항상 고봉밥을 주셨다. 3층 건물 3층에 살던 외할머니네는 방이 많았고, 손녀딸 하나였던 나는 외가에서 더욱 특별함을 느꼈다. 어렸을 적 사촌오빠들과 이불 뒤집어쓰고 과자먹으며 토요미스테리를 봤었고, 뒷건물 살던 작은 외삼촌네와 외할머니네를 왔다갔다 뛰어다니며 놀았다. 2남 2녀의 막내였던 우리 엄마가 낳은 하나뿐인 손녀딸인 나와 내 동생을 많이 예뻐해주셨고 매년 식혜철이 되면 우리가 잘 먹는다고 항상 두 병씩 준비해주셨었다.
한 번은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갔던 기억이 난다. 나와 동생은 어렸었고 할머니와 같이 잤던 기억이다. 외할머니 옆에서 잘때 할머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다 한 땀씩 돌리다보면 어느새 잠들었다.
나의 중, 고등학교 시절 외할머니와의 기억은 희미하고 대학생이 되고 난 뒤부터 다시 할머니와의 시간이 만들어졌다. 그나마도 명절에 가는게 다였지만, 여전히 고봉밥을 주셨고, 언제부턴가 외할아버지의 병색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어느 명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밥을 먹고, 과일을 먹을 때 외할아버지가 쇼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그 날 이후 할아버지는 병원 생활을 하시다가 겨울로 넘어가던 어느날 저녁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먼저 보낸 4년 이후 큰 외삼촌을 보내고 홀로 생활을 시작하셨다.
우리 외할머니는 강인했다. 목소리도 크고 자식들이 뭘 사오면 필요없다며, 본인이 다 갖고 있고, 할 수 있다며 항상 마다하셨다. 엄마는 준비해간 것들을 도로 가져가라 하는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할머니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17년 말복이라던가. 복날을 맞아 엄마가 사간 고기를 함께 먹던 외할머니는 당신이 씹으시기에 딱딱한 부위를 버리러 가다 넘어지셨고, 그 이후 병원생활을 시작하셨다. 외할머니는 병원 생활하시는 내내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셨지만, 결국은 병원에서 맞은 본인의 89번째 생일을 넘기기 20분 전에 돌아가셨다.
우리 엄마는 못내 그해 말복을 마음에 걸려하며 자신의 탓인양 마음 아파했다. 투덜거리던 본인의 말투를 탓하고, 돌아가시기 몇 일 전 하루 병원 안 간 날을 후회했다. 우리 가족은 많이 울었다. 나는 정말 집 앞에서 병원 앞까지 데려다주는 버스가 있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을 안가고 마지막 순간에야 그 버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 손이 그렇게 부드러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잡았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에 할머니 손을 잡고 할머니 얼굴을 만져보는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내내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후회됐고,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사무치게 느꼈다.
큰 외숙모에게만 외롭다고 솔직히 말했다던 외할머니의 마음을 미리 알아채고, 조금 더 자주 전화하고 자주 얼굴 비췄어야하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는 일 밖에 할 수 없어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예뻐해주셨던 손녀딸인데. 옆 침대 할머니 손녀딸이 그렇게 자주 찾아가 인사하고 할머니를 챙겼다던데,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 긴 시간 할머니를 혼자두게 했는지 속상하다.
외할머니는 가을이 완연한 날,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삼우제 날짜까지 맞춰주신 할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마지막 그 고왔던 모습으로 좋은 곳 가시고, 남은 가족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게,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