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마다 특정한 말이 유행하는 경우가 있다. '웰빙'과 '힐링'이 그러했고, 요즘의 '공정'이 그러하다. 무엇이든 용례가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오남용도 증가한다. 같은 말을 저마다 다른 뜻으로 이해하는 것을, 단어의 오남용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나는 이렇게 과용되는 언어일수록 조심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해당 언어의 정의를 스스로 내려보는 것이 좋다. 자의적으로 내려진 그 정의가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해야만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반증 가능하게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사용하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사용법이 올바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공감', 근래에 무척 과용되는 낱말 중 하나이다. 정치권, 미디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근무 환경-"헛헛, 요즘 젊은 친구들은 공감해줘야 한다던데 말이야."-에서조차 쉽사리 공감을 운운한다.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공감은 타인의 감정, 의견 등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타인의 부정적인 상황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즐거움, 행복보다는 비극, 슬픔, 억울함, 아픔 등에 쓰이는 것이 어울려 보인다. 또한, 공감은 쉽사리 동의와 같은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요약해보면 지극히 단순한 2행정 메커니즘이다.
2행정 메커니즘 : ① 타인의 부정적인 감정, 의견 → ② 자신도 그에 공명되어 함께 슬퍼함
지난달 한 미국 여성이 남성인 자신의 담당의가 섹시하다며 그의 신상 정보(이름, 사진, 근무장소 등)를 트위터에 업로드한 해프닝이 있었다. 온라인에는 지탄하는 반응이 다수를 이뤘다. 일종의 성희롱에 해당되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이라면 큰 난리가 났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분분했다. 이는 충분히 공감을 통해 도출된 공분이라 할 만했고, 지극히 옳은 반응이었다. 대상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관계없이 성희롱, 동의 없는 촬영, 신상 정보 공개는 분명 지탄받을 일이다.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 복잡한 행정은 필요치 않았다.
놀라움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의도치 않게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 남자 의사는 인터뷰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그 일부를 아래에 발췌해 본다. (한글 번역은 의역이 많아 영문 원본도 함께 올린다.)
Regarding the discussion of sexual harassment and double standards: I thought that the Reddit discussion was quite interesting and that many individuals made excellent points. By definition, many of the comments on my picture would be considered a form of sexual harassment, and I can totally understand how people consider this to be a double standard in light of the #metoo movement. And that if those same comments were made about a woman there would an uproar. From my perspective, I would be remiss if I didn’t acknowledge the fact that I never felt that I was a “victim”. As I reflect more on this sentiment I realize the reason for this is undoubtedly because of my “male privilege.” I have had the privilege of never once feeling threatened or intimated by a woman in a sexual manner, I have had the privilege of never being catcalled, and I have had the privilege of never experiencing what it’s like to be followed home by a stranger that was a woman. It is because of these liberties that we enjoy as males that I think the sexual harassment discussion may have to be interpreted differently in my situation.
성희롱, 이중 기준에 대한 토론에서 렌딧 유저들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일종의 성희롱이고, '#미투'의 관점에서 이중 기준이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이었다면 난리 났다는 의견을 이해한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느낀 적이 없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이것은 내 '남성이라는 특권' 때문임을 깨달았다. 나는 성적으로 여성에게 위협당하거나 휘파람 등으로 추파를 당해본 적도 없으며 낯선 여성이 집까지 따라온 적이 없다. 남성으로서 누리는 이러한 자유 때문에, 내 경우에 성희롱에 대한 토론은 다르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보다 복잡한 공감은 2행정 메커니즘을 넘어선 이후에 작동한다. 인터뷰를 한 의사는,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여성에 비해 남성인 자신이 확연히 덜 힘든 것에 주목했다. 다른 사람이 처한 처지를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 전후 맥락을 짚어 볼 수 있는 섬세함이 추가될 때에야 이와 같은 폭넓은 공감을 자아낼 수 있다.
남의 어려움이 자신의 경험과 일치할 때 우리는 직접적으로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한 소리굽쇠의 진동이 다른 소리굽쇠로 전달되는, 일종의 공명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차츰 각박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이러한 공감은 그 자체로 귀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어쩌면, 조금만 세게 말한다면, 지극히 당연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이 자신이 경험한 바와 확연히 다르게 전개될 때, 비로소 좀 더 수준 높은 공감을 할 수 있는지 판가름 나곤 한다.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왜 더 고통받는가." 보다 많은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쉽게 마주하기 어려운 질문일지 모르겠다. 2행정 메커니즘만을 단호히 신봉하는 이들은 그들이 경험한 슬픔과 아픔, 후회에만 공명할 수 있는 반쪽자리 소리굽쇠가 되어간다. 그리고 자신이 그은 경계면 밖의 고통에는 지극히 깐깐해질지도 모른다. 위에서 언급된 의사가 자신의 경험 - 몰래 사진이 찍히고 신상도 공개되었지만 그다지 무섭고 힘들지 않았던 - 에 천착한다면 어땠을까. 불법 촬영당해 힘들어하는 다른 이의 항변은 '마음 약한 사람의 하소연'으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나 때는 야근도 늦게까지 하고 선배들이 주는 술은 군소리 없이 마셨다며 경험담을 늘어놓는 직장 선배가, 한국만큼 밤길이 안전한 나라가 어딨냐며 마음 놓고 택시에서 잠들어버리는 술 취한 남성이, 젊을 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에 비정규직은 휴식공간이 열악해도 싸다는 대졸 정규직이 공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