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2월 눈여겨본 글

'매주 눈여겨본 글을 모아보자' 매거진을 시작하며

by 한소리엘

매일매일 습관처럼 페이스북 타임라인의 스크롤을 훑는다. 친구들 소식 때문이 아니다. 페이스북은 어느샌가 지인들의 안부를 묻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컨텐츠를 모아주는 역할로 변모한 것이다. 새로운 정보들은 쏜살같이 흘러가 버리기에, 나중에 읽는다고 '좋아요'만 눌러놓고 제대로 읽지 못하는 글들도 수두룩하다. 주말마다 다시금 좋아요-로그를 확인하며 찬찬히 복기하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매주 내가 읽은 인상 깊은 글들을 모아두기 위해 내 브런치 계정에 '매주 눈여겨본 글을 모아보자' 매거진을 개설했다. 타인의 글을 개인공간에 박제하는 만큼, 기사나 매거진글과 같이 공개되었으며 공유를 염두해둔 글만을 보관할 생각이다. 더불어 내 나름의 생각들도 찬찬히 메모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17년 12월의 글

한 해가 가기 전이 12월에 인상 깊게 읽은 글들을 공유하려 한다. 내년부터는 가능하면 매주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이 매거진을 채워나가려 한다.


01. 부모는 사과하지 않는다.

(`17.12.04, 김아리, 김아리의 행복연구소, 한겨레21)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란 존재에 대한 권리와 책임을 내가 온전히 갖는 것이다. 내가 인생의 문제를 결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고 그것에서 삶을 배워나가는 것이다. (중략) 부모가 준 상처가 남아 있을지라도 나란 존재를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다. 연민으로 상처를 돌보고,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내 삶을 결정해나가는 것이다. 완전히 독립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올해 읽은 글 중에 부모-자식 관계에 대해 가장 심도있게 고민하게 도와준 글. 내가 가진 상처, 향후에 있을 내 자식을 마주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두려움과 맞닿아 있는 부분을 정확히 지적해주는 글이다. 내 나름의 역린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꽤 많은 20-30대에게 도움이 될 글이라고 생각한다.



02. 미성숙과 결점

(`17.12.11, 김미소, 젊은시각 2030, 미주 한국일보)

http://www.koreatimes.com/article/20171210/1092323

"동시에 타인의 발전 가능성도 믿어보아야 한다. 타인이 날 무례하게 대해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도, 그건 단지 그 사람이 관계를 잘 쌓아 본 경험이 부족해서 저지른 실수일지도 모른다. (중략) 타인이 경솔한 행동을 했을 때도, 질책과 비난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음엔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발판을 놔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타인의 실수나 허점은 타인을 까 내리기 위한 먹잇감이 아니다.

회사에서 날이 가면 갈수록 인성이 퇴보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타인에 대해 갈수록 엄격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이 글을 접하게 되었다.


03. 코끼리

(`17.12.03, 부희령, 삶과 문화, 한국일보)

"정체성이라는 것은 시야를 좁힌다. 명확하게 밖에 있거나 혹은 한가운데 있으면 보아야 할 것으로 규정된 것만 보게 되기 쉽다. 소설가가 되기 전 나는 문학을 선망했다. 간신히 소설가라는 정체성을 붙잡고 있을 때 문학은 나에게서 더 멀어졌고, 그것은 쓰라린 경험이었다. 소설가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인 채 문학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는 사람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뜻밖에도 나의 정념이나 자의식과 상관없는 문학, 얼마든지 생각해도 되는 코끼리와 우연히 마주쳤다. 내가 아닌 존재, 내가 아닐 수밖에 없는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이로움. 문학은 늘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 감각과 의미를 되살리고 일깨웠다. 오랫동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나의 정체성을 언어로 만들어 설명하는 것은 꽤나 큰 부담을 준다. 표방되어 명명된 용어에 내가 짜 맞춰지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속성을 언어로 정리했을 뿐인데 그 언어에 속박된다는, 선후가 뒤바뀌는 듯한 감각. 한 번도 문학에 관련된 사람이었던 적은 없지만, 소설가가 느낀 고민이 온전히 나에게 와닿았던 글이다.



04. 지금, 일본 여성의 삶

(`17.12.14, 안은별, 아이즈)

"90년대부터 본격화된 경제 구조 전환 속에서 불확실한 세계로 내몰린 ‘평범한 사람(일반인)’들의 불안이 이런 흐름의 배경에 자리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중략) 그러나 여기서의 ‘일반인’은 그들이 자처하는 상식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약자를 혐오하는 일에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정상성의 외피라는 건 명백하다. 그들 ‘일반인’들이 사수하려는 ‘남자는 밖에서 벌고 여자는 가정을 지키는’ 가족 모델, ‘남성은 남성답게 여성은 여성답게’를 ‘정상’으로 했던 모델은 그들을 불안으로 내몰았다는 저성장으로의 경제 구조 전환과 함께 그 근간부터 붕괴되어 왔다. (중략) ‘불안’해서 ‘우경화’된다는 그들은 구조의 희생양이 아니라 구조의 진실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이들인 셈이다. "

언제였던가, 누군가 술자리에서 말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여성의 인권은 신장되지 않았냐?"라고. 예전이라는 기준을 어디서부터 잡느냐의 문제도 물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권이 더욱 평등해질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에 문제를 제기해야 했다. (그 때는 그러지 못했다.) 갈수록 우경화되는 사회에서, 인권의 역사는 명백히 퇴보할 수도 있다고. 시간의 흐름과 역사의 흐름은 역행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본의 역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



05. 낙태죄 폐지와 공론화의 위험

(`17.12.06, 백영경, 창비)

"낙태죄 논의는 누군가의 존재와 인권은 찬성하거나 반대할 문제가 아니라는 소수자 권리의 논의 틀과 더 닮아 있다. 생존을 위해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혐오발언을 일삼는 세력을 찬반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저울에 놓으면 안 되듯이, 여성들이 구체적인 삶에서 겪는 문제들을 두고 종종 그 현실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별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여론으로 판결하겠다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공론화라는 공적인 장을 통해서 혐오발언이나 특정 종교의 입장이 확산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책임 있는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게다가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 모두가 이 문제는 다수결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에서, 공론화위원회를 통해서 세련되게 해결될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

다른 사람도 다른 사람이거니와, 나 부터도 습관처럼 '다수결'과 '민주주의'를 동의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동체가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가치 판단의 문제 중 상당수는 여전히 다수결의 논리만으로 처리하기에 버겁다. 다수결은 그 입맛만큼이나 너무도 쉬운 문제해결 방식이 아닌가. 다수결 만능주의와 민주주의는 전혀 다르다.



06. 스마트폰 음성인식 서비스는 왜 여성 목소리일까?

(`17.12.01, 박주연, 일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전화 산업 초기에는 주로 남성을 전화 교환수로 채용했었다. 초창기 교환수의 일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층이었던 전화 가입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일이었다. 기술적 지식 이상으로 고객 접대가 중요 요소가 되었고 전화 산업은 이 일이 여성에게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일본과 한국의 경우는 20세기 초 여성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경제적 이유와 여성의 목소리가 더 ‘상냥하고 친절하여’ 고객에게 평판이 좋다는 문화적 이유가 모두 작용했다. (중략) 교환원들의 말은 처음엔 제각각이었으나 일정한 틀을 갖추는 방식으로 정비되었고, 그것은 교육으로 전수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규격화되었다. 이처럼 자본주의 테크놀로지와 여성의 목소리는 기술적이고 문화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결국 ‘듣기 좋은’ 소리라는 의미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음성인식 서비스 , IoT, 인공지능 비서가 세간에 화두가 된지도 꽤 오래 된 것만 같다. 수많은 서비스가 런칭되는 가운데, 나는 이리도 간단한 것에 의문점을 제기한 적 없음에 반성한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하고 사용하지만, 그 맥락 곳곳에는 여전히 위계화된 권력 구조가 녹아 있다.



07. 정신질환인이 본 '정병러' 문제

(`17.12.12, Behee, 슬로우뉴스)

"실제로 범죄와 정신질환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는 분석 결과가 상당수 존재합니다. 질환자의 우범률이 높지 않다는 통계는 유명하죠. 실질적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은 가해자가 아닌 폭력 등의 피해자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중략) 누구도 더 중하지 않고,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소 뜬금없는 논쟁이 시작되었던 적이 있다.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은 여성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환기룰 촉구했지만, 어느새 정신질환인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도 표면 위로 드러나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보다 소수이며, 환자인 그들에게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만으로 안이하게 대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크게 드러나지도 않기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차별한다.



08. 평가방식 못 믿는 청년들 "차라리 시험으로 줄 세워 주세요."

(`17.12.18, 남지원, 경향신문)

& "정규직 되려면 시험 봐!" 그들이 차별에 찬성하는 이유

(`17.11.29, 박광희, 한국일보)

"'시험으로 사람들을 뽑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현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시험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방식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들 젊은 정규직이 앞세우는 가치는 공정과 경쟁이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이나 최근 불거진 강원랜드, 금융감독원, 우리은행 등의 채용 비리는 우리 사회의 정실주의를 고발하면서 공정과 경쟁의 가치를 더욱 드높였다. 그러나 시험과 공개경쟁이라는 절차만 공정이고 나머지는 불공정이라 하는 것은 그 주장하는 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비정규직의 땀과 노력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들은 고용 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 이미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버젓이 제 일을 했다. 그들이 정규직이 된들 청소나 경비, 시설관리처럼 하던 일을 계속할 테니 정규직 몫인 사무행정 일을 침해할 까닭이 없다. 임금 역시 그들만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 실은 정규직에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규직이 반발하는 것을 보면 공정과 경쟁이라는 구호 뒤에 숨은 본심에 의문이 생긴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을 빌리자면 정규직 되기가 어려운 현실에서는 정규직 자체가 하나의 문화자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경제 자본은 많을수록 좋지만 문화자본은 희귀할수록 가치가 올라간다. 타인과의 구별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는 본능이 정규직 지키기라는 껍데기 속에 숨어있을지 모른다."

단편 드라마 <KBS2 드라마 스페셜 - 혼자 추는 왈츠>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작중 주인공은 인턴에서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4년제 대학 출신 학생이다. 그녀는 술자리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계약직의 머리채를 잡으며 울부짖는다. 왜 내 자리를 뺏었느냐고. 정작 정규직 전환 면접에서 성희롱적인 질문을 하며 이죽대던 과장은 그 옆에서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드라마의 백미다. 상징적인 그 씬을 회상하며 이 글을 읽었다. '먹고사니즘'에 치인 노력파인 우리는 무엇을 잃지 못했을까.



09. '자식 관리도 안 하는 맘충', 노키즈존의 진짜 의미

(`17.10.23, 차가운손, 고함20)

누군가는 노키즈존이 공연장의 연령제한과 비슷한 조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키즈존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은 소란스러움을 싫어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일부 노키즈존 카페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부모가 음료를 테이크아웃 하는 것도 막고 있다. 노키즈존이 부모를 향한 적극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메시지는 누구를 겨냥할까? 부모 중 육아를 담당하는 쪽은 주로 여성이다. 결국 노키즈존의 존재는 여성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검열한다. 테이크아웃까지 금지하는 극단적 조치로 미루어 볼때, 노키즈존은 ‘자식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맘충’에 대한 혐오의 메시지인 셈이다. (중략) ‘아재’라는 구체적인 용어가 등장했음에도 4-50대 남성들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지 않는다. 4-50대 남성들에게서 들려오는 것은 오히려 ’이제 설 자리가 없다’는 자기연민의 목소리다. ‘맘충’과 ‘아재’의 사회적 권력 위계는 노키즈존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노키즈존은 있는데 왜 노아재존은 없냐’는 성토가 그저 농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이유다.

솔직해지자. 아무 생각 없이 접했을 때, '노키즈존'은 소비자의 니즈를 최대한 반영한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선택이라고 여긴 적이 있다. 아무리 합리적인 결정이더라도, 그 현상의 경계선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늘 하위를 형성하는 특수한 계급이다. 단견으로 결정된 합리는, 보다 사려깊은 가치 판단보다 늘 선행되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늘 외양간을 늦게 고치는 일이 뒤따른다.



10. [대한민국 성매매 보고서] 강남 성매매 특구를 가다

(`17.11.22, 하어영, 한겨레21)

& ‘성매매 피해자’ 여성에게 법적 책임까지 들씌우나

(`17.12.13, 변정희, 한겨레21)

"여성의 몸을 거래하는 거대한 불법이 토착화하고 묵인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겨레21>이 만난 한 업주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강남을 누가 먹여 살리는지 잘 따져보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업주들은 경찰·세무·소방 등 관할 관청을 직접 관리해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업소에서는 담당 경찰서 지구대, 여성·청소년계 등에 팀별로 40만원 정도의 촌지를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2~3년 사이 경찰과 업주의 유착이 문제가 돼 직접적 로비는 없어졌다. 한 업주는 '여전히 경찰 쪽에는 핫라인을 복수로 깔고 있다.'며 '단속이 뜨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받게 돼 있다.'고 말했다. (중략) 실제로 2007년 이후 대대적인 단속이 있을 때마다 먼저 항의한 것은 업소가 아니었다. 경찰 단속에서 지역 민원은 양날의 칼이다. 대대적인 단속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단속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장안동이 전자라면, 강남은 현재로서는 후자에 가깝다. 업소 단속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 경찰 관계자는 '입구에 경찰이 배치되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당장 다음날 인근 상인들이랑 여성들이 항의하러 찾아온다'며 '그렇게 며칠 시달리고 나면 단속 의지가 꺾이고 성과도 떨어진다'고 했다. 단속으로 한 업소가 며칠 동안 영업을 못하고 지역 상인들의 수입이 급감해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면 곧바로 경찰로, 국회로 지역 주민들의 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597.html

"한국 사회에선 지적장애 여성 청소년에게도 '성매매녀' 딱지를 붙인다. 그러다보니 지적장애 여성이면서, HIV 감염인이면서 청소년이 아닌 그가 법이 정한 '성매매 피해자' 지위를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를 만날수록 그동안 그가 입은 심리적 피해의 상담과 지원이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성매매 피해자'인 그가 왜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걸까. 성구매자인 남성은 물론, 알선남들은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는데 말이다. 여성은 성매매 현장에서 수많은 위협을 겪는다. 이제 한국 사회는 그에 대한 법적 책임까지 여성에게 뒤집어씌우려 한다. 이처럼 파렴치한 사회야말로 유죄가 아닌가.

'자발적'인 성매매자에 대한 환상을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자발적'인 성구매자는 말할 것도 없겠다.



11. 인공지능의 시대,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17.12.29, 최윤섭, 최윤섭의 Healthcare Innovation)

해당 글은 복붙이 금지되어 있어 링크만 첨부한다. 글쓴이는 미래에는 인간 의사의 공감능력 강화, 환자 혹은 환자 가족과의 의사소통 능력이 강조되고, 고전적인 의미의 수술 숙련도는 퇴화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는 산업계 대부분에서 발생될 무수한 변화의 맥락과 일치한다. '전문가'로서 획득된 특정한 권력은 갈수록 낮아지고, '보다 친절한' 서비스 제공자로서 경쟁되는 시기를 희망한다.



12.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한국인들에게 드리는 고언

(`17.10.31,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다른백년)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을 사회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중요한 이슈를 친구나 가족과 논의하며 언론을 만들어 보자.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의미 있는 토론을 하도록 스스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 전체 그림을 보지 않고 특정인에 대한 호불호를 외치며 논의를 끝내는 감정적 발산은 지양해야 한다. 언론에서 ‘진짜 토론’을 보고 싶다면, 우리 스스로 진짜 토론이 가능한 문화를 만들고 습관을 바꿔야 한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한국 문화는 새로운 활력을 얻을 것이고, 진실을 향한 객관적 탐구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럼 언론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할 수 없게 된다. 시민은 더 이상 언론의 거짓과 직무 유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사소한 가십이나 연예인 이야기에 집중하며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노력도 힘들어질 것이다. 시민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기존 방식을 버릴 때 언론을 향한 우리의 기대와 요구 수준도 진정으로 변화할 수 있다."

다소 오래된 글이지만, 12월에 접한 글이기에 해당 글로 12월 링크 모음을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