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 Lilies, 2007
83분의 러닝타임으로 비교적 길지 않은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빠르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소녀들의 처음을 말한다. 십 대 소녀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핸드폰을 포함한 여느 것들 없이 온전히 그들의 전신으로써 표현하고자 한다. 2007년에 프랑스 출신의 감독과 배우가 등장하고 프랑스에서 촬영됐다는 정보가 있으나 꼭 프랑스에만 국한되는 얘기도 아니다. 시기와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공감할 법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리라.
나를 포함해 셀린 시아마의 필모그래피를 역순으로 따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이 많은 관심을 모았고, <톰보이>(2011)와 <워터 릴리스>(2006)가 차례로 개봉했다. 2015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걸후드>(2014)가 상영된 바 있으나, 나는 보지 못했으니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왠지 <걸후드>에 대한 기대감은 시아마의 영화를 보면 볼수록 줄어들고 있다. 성 요한 축일 전야에 차갑고 마른땅에 지펴진 장작불이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드레스에 옮겨 붙을 때, 감독이 애써 공들인 미쟝센을 관객이 느끼고 사유할 공간이 사라진다. 엘로이즈의 하녀가 낙태를 하는 것은 이 영화의 어떤 행위보다 큰 사건이 될 수 있는데, 그저 주변 인물의 지나가는 일처럼 여겨지고야 만다. 마리안느(노에미 메를랑)가 고용되기 전에 있었던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엘로이즈의 얼굴이 마르안느에게서 완성될 수 있음을 말하는 서사도 그랬다. 오프닝에서 교육받은 화가의 소묘는 마리안느의 성기에 위치한 거울로 이어진다. 영화가 말하는 동성애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담론이 영화 속 인물들의 처지를 생각할 자리를 다 뺏어버린다. 히치콕의 <현기증>(1958)에서 어떤 장면들을 차용했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그렇다.
<톰보이>는 그런 주변 장치들을 많이 제거했다. 오프닝에서 자동차 지붕을 열고 바람을 맞고 있는 로르(조 에랑)의 뒷모습, 로르가 리자(잔 디송)에게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소개할 때까지도 그의 신체적인 성별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자비로운 어머니, 사랑스러운 여동생 잔(말론 레비나),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를 안아줄 줄 아는 리자까지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미쟝센들 역시 어떠한 걸림돌도 없이 펼쳐진다.
다시 그보다 전의 <워터 릴리스>는 어떠한 확신도 없이 그저 병렬과 나열에만 의존한다. 마리(폴린 아콰르)는 안나(루이스 블라쉬르)의 싱크로나이즈 공연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플로리안(아델 에넬)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다. 그 길로 플로리안을 더 자주 보고자 수영팀에 등록을 하는데, 한 달 간의 등록 절차를 무시하고서도 하루라도 빨리 그녀의 곁에 있고 싶어 한다. 마리는 또래의 친구들보다 뚱뚱한 자신의 체격을 부끄러워해 모두가 나가고 혼자가 된 뒤에야 옷을 갈아입는다. 시간이 꽤 지나기도 했고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들어왔던 남자 수영팀의 프랑수와(워렌 자킨)에게 그대로 나신을 보이고 만다.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은 하나의 육체가 다른 육체를 마주하고, 관찰하고, 욕망하며 때로 혐오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외적으로 모두 다른 소녀들은 칼군무를 소화해내며 그전에 정형화된 화장을 하고, 하나의 스타일로 머리를 묶으며, 몸에 난 털을 밀어야 한다. 내적으로도 모두 다른 소녀들은 각기 다른 마음과 이유를 가지고 사투를 벌인다. 마리와 안나가 단 둘이 수영장 물에 둥둥 떠선 천장을 올려다보는 불분명한 표정이 오히려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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