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ng On, 2019
어려서 할머니가 맨 손으로 닭을 잡아 끓여준 치킨(<우리집>, 2002)은 없지만, 하교 후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 부재한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반겨준 가족(<안녕하세요>, 1959)은 없지만, 원치 않은 조부모님과의 동거는 있었다. 하루는 할머니가 시장에서 세일러문이 크게 그려진 옷을 사다 주셔서 입기 싫은 걸 억지로 입은 적이 있다. 서울에서 고모가 와서는 무슨 남자애가 이런 걸 입냐며 놀리자 못 들은 척, 잠든 척했던 기억은 있다. 중학교 때는 첫사랑이었던 여자 친구에게 짝퉁 신발을 선물한 적은 없어도, “자기야 사랑해”라고 적힌 컵을 선물하고자 했는데, 종업원의 실수로 “친구야 사랑해”라고 적힌 컵을 선물한 적이 있다. 후에 포장을 뜯어보니 친구라고 적혀있어서 되게 속상했었다.
쫓기듯 병기(양흥주)네 가족은 집에서 떠나온다. 얼핏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2019)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려나 싶었으나 조금 달랐다. 옥주(최정운)와 동주(박승준) 남매는 병기의 사업 실패로 할아버지 영묵(김상동)에게로 향한다. <우리집>이 아이들만의 여정이었다면, <남매의 여름밤>에는 어른이 등장한다. 다마스에 짐을 가득 싣고 할아버지네로 이동하는 가족의 모습을 앞선 촬영차에서 담는다. 여기서 저 뒤의 차 안에서 오가는 대화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영화는 들려준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간다는 것을 미리 알렸냐며 병기에게 묻는다. 병기는 그렇다고 한다. “할아버지 만나러 가니까 좋냐”는 질문에 옥주는 “별로”라 일갈한다. 도착해서도 생판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동주에게 아무 거나 만지지 말라고 타이른다. 근데 한 술 더 떠, 이혼을 앞둔 고모 미정(박현영)도 가방을 끌고 와서는 군식구가 되려 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일어나는 소동은 가족이라서, 가족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햇빛 잘 드는 양옥집에서의 낮잠과 함께하는 꿈들, 국수를 비벼먹는 오후에 찾아온 격정, 첫사랑의 끝, 엄마를 향한 그리움, 늦은 밤잠을 깨우는 할아버지의 선곡까지 소박하면서도 때로 북적북적한 가족의 모습들 속에 남매가 있다. 옥주와 동주 남매가 있고, 병기와 미정 남매가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 영묵의 오랜 세월이 담긴 양옥집이 있다. 얼핏 각각의 비선형적인 이야기의 나열들이 크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양옥집 안에서 각자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따금씩 아무 의미 없이 텅 빈 계단이나 거실의 소파를 보여주더라도 찬찬히 구축하고 팽창한 우주 안에서는 달랐다.
윤단비 감독의 작품을 이전에 본 적도, 볼 수도 없었지만 그가 영화적으론 그냥 넘길 순 없었으나 감정적으로 용인한 장면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내게는 무슨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후반부 장례시장 시퀀스에서 옥주가 내내 피하고 외면했던 엄마까지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장면인데,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배경으로 차례로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사실 그들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옥주의 꿈이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 같았던 엄마의 얼굴이 끝끝내 꿈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동주에겐 절대 허용하지 않았던 방충망 안의 공간을 고모에겐 선뜻 내어주었고, 그리고 듣게 된 그녀의 갓난아기 시절의 꿈처럼 현실성이 없는 어떤 장면이 우리의 삶에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들도 더러 있기 마련이다.
집으로 돌아와 고모도, 할아버지도 없는 식사자리에서 옥주는 맞은편에 있던 소파를 보며 쌓였던 울음을 터뜨린다. 아마도 옥주의 시선일 것으로 여겨지는 소파를 바라보는 시점 숏은 그러나 거리감에 있어 문제가 있다. 영화 내내 이 양옥집의 구석구석을 마치 내가 활보한 것처럼 경험했기에 이 거리감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옥주가 있던 자리에서의 시점 숏이라기엔 너무 가까웠다. 양옥집에 처음 도착해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던 그 소파를 봤을 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옥주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장면도 있는데, 페달이 어지간히 무겁지 않고서야 그렇게 세게 페달을 밟는데 저런 느린 속도일 리가 없었다. 단 하루가 아닌, 몇 주, 몇 달은 지속될 그 긴 감정의 파고를 쏜살 같이 담지 않으려 했을 수도 있을 테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음을 보여주며 성장했음을 암시할 수도 있었겠으나,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던 옥주가 방충망도 없이 잠든 모습을 보여주며 영화는 맺는다.
#남매의여름밤 #최정운 #박승준 #양흥주 #박현영 #김상동 #윤단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