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에 들어서면.
드라마 제작 기간으로 들어오면 일상이 무너진다. 모든 스케줄이 제작 최우선이 된다. 연출이라는 직군의 특성 상 다른 모든 분들의 의견에 반응을 해야하니, 내 스케줄은 완전히 열어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일상이 유지될 턱이 없다.
어릴 때는 그것도 일종의 멋이었다. 할 때 화끈하게 하고 쉴 때 푹 쉬는 거지. 그 때는 일상의 루틴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땐 일이 아니어도 어차피 일상은 종종 무너졌다. 그래서 이런 방식의 노동이 좋았다.
그런데 이게 긴 호흡의 직업이 되니 일에 들어올 때마다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관계에서도 건강에서도 괴롭기만 하다. 가족에게 미안하고 몸도 힘들다. 길게 가려면 일상의 건강함과 일을 병행해야 한다고 늘 되뇌인다. 그러나 내 작업의 자율권을 제대로 가지기 힘든 ‘하청의 하청의 하청’ 방식의 노동 조건에 들어선 프리랜서로서 이런 바람은 언감생심이다.
그리고 일상 복원을 외치기 가장 어려운 이유는, 나의 일상 복원이 타인의 일상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빨리 쉰다는 것은 누군가 그만큼 더 일을 하게 된다는 의미가 될 때가 있다. 같이 하는 협업에서 휴식에 대한 언급이 당당해야 하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운 이유는, ‘갑’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을’끼리의 형평성의 문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 복원을 간절히 원하다가도 쉽게 입 밖에 내지 못한다. 각자 알아서 자신의 일상을 지키고 있기를 조심스레 바랄 수밖에.
일상이 무너지는 것이 일상인지라, 일상을 소중하게 가꾸고 루틴을 지키는 법을 아직도 익히지 못했다. 이 나이 되도록 삶에 서툰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무언가 더 빨리, 더 멋지게, 더 남다르게 일과 삶의 핵심을 성취해보고자 했던 어린 날의 추구는 이제와서 누진세처럼 내 삶에 매겨진다. 지금 알게된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런데 그 때 그 놈은 알았더라도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