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 아저씨 Jan 28. 2024

내 마음속의 기억산책. (4)

중학교시절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했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고 있어도 홀로 살 수 없으며, 사회를 형성하여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동물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각종 모임을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시작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첫 스타트 시점인 것이다.

시쳇말로 각종 모임에서 인싸로서 행세를 하려면,

핸드폰에 지인 저장번호가 이천 개 이상

ㆍ각종 활동 모임이 20개 이상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인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러면 모임을 종류별로 한번 분류해 보자.

지역별로는 향우회 모임,

출신학교 및 학과별로 모이는 동문회 및 동기회모임,

ㆍ취미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각종 서클 및 동호회 모임,

ㆍ회사로 보면 입사동기, 퇴사동기, 같은 시기에 근무한 부서나 현장직원  모임, 임원동기 모임,

ㆍ신앙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종교모임,

ㆍ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밥 먹기 위해 만나는 각종 조찬, 오찬, 저녁모임 등.

이외에도 한국 사회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한 모임은 동창회나 동기회 모임이 아닐까 싶다.

본격적인 사회활동이전, 학업 및 준비기간에 서로 어울리다 보니 세간의 잇속을 벗어나 조금은 순수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한마디로 친구들 모임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에게 중학교 동창이나 동기모임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렵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유치원동문 모임도 있는데 중학교 동창모임은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무엇일까?


꼬집어 말할 수 없겠지만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기간으로 기질이나 성향이 확실치  않아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선택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춘기의 한가운데인 질풍노도의 시기이다 보니 친구들과 함께 공유할만한 아름다운 추억이 거의 없는 것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경우를 봐도 삶의 굴레에서 결실도 없이 가장 다이내믹한 시절이 중학교 때가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릴 나의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보자.


ㆍ반 배정 시험


초등학교 졸업 무렵 중학교 배정을 했다.

안동시내에 중학교가 3개 있었으니 어느 중학교에 배정되느냐는 복불복 게임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레통에서 나오는 은행알에 새겨진 번호로 학교 배정이 이루어졌다.


나의 경우 3개 학교 중 집에서 가장 먼 학교로 배정이 되었지만 나름대로 명문고 진학률이 좋아서 큰 불만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 고등학교의 명성은 오로지 명문고나 명문대학 진학률만으로 판가름된다.

70년대만 해도 고등학교 입학은 대학교처럼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내고 입학시험에 합격을 해야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3개 중학교 모두 명문고 진학률을  높이기 위해 나름대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배정받은 중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모아서 특별반을 만든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학 전 예비소집일에 반 배정시험을 치른다는 통보가 왔다.

초등학교에서 공부를 그런대로 잘한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6학년 때 신생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마지막 한 해는 거의 학교에서 노동을 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선생님들도 수업보다는 학교 환경정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제대로 된 수업을 받은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런데 반 배정 시험을 본다고 하니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었다.

이미 학교에서 결정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 학교에서 특별반은 만들지 않고 9개 학급에 시험등수대로 순차적으로 학생들배정했고 나는 2반에 배치가 되었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이 학급 반장과 부반장을 지목하고 나서야 반 배정시험에서 내가 1학년 전체에서 17등을 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 1등이 반장, 2등은 부반장"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로 중학교에서 처음으로 학급 부반장이란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이 시작되었다.


ㆍ독서반 선발


중학교 졸업 때까지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의 책을 자의적으로 읽어 본 적은 없었다.

책을 사서 읽기 어려운 집안 사정도 한몫을 했었지만 당시만 해도 학교를 마치고  난 후 놀거리가 너무 많았다. 특별한 재밋거리는  없었지만 방과 후 노는 시간이 그냥 좋았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운 날에는 더운 대로 그리고 계절마다 다양한 놀이거리가 있었다.

천렵, 낚시, 도토리 줍기, 제기차기, 도박의 일종인 짤짤이, 스케이트 타기, 오징어게임, 자치기등.

시험 때 벼락치기 공부를 제외하고 차분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은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아뿔싸 그런데 2학년 여름 방학기간에 학교 독서반에 배정이 되었다.

유난히 나를 사랑(?)하신 담임 선생님이 강제적으로 배정을 한 것이다.

체육을 담당하고 있었던 담임선생님은 학급 학생들의 성향을 세세하게 몰랐고 단지 반에서의 성적과 활동성만을 고려했던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다른 친구들로 바꿔 달라고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감히 체육을 맡고 있는 담임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 황금 같은 여름방학 시기의 절반을 학교 도서관에서 어쩔 수없이 책과 함께 냈던 기억이 있다.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도 우연히 역사인물들의 위인전을 읽는 고전경시반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자발적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교내 고전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시내 학교 대항으로 시험을 치는 것이 번거롭긴 했지만 그로 인해 시대별로 위대한 장군들의 전기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가장 좋아했던 장군은 백제의 계백과 흑치상지장군으로 기억한다.

백제의 마지막 전투를 죽음을 각오하고 치른 계백장군과 후백제의 부활을 꿈꿨던 거무튀튀한 피부색을 가졌던 흑치상지장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독서반에 배정한 이유가 "공부는 그럭저럭 잘하는데 놀기만 좋아하는 나"를 위한 담임 선생님의 배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 당시의 나에게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던 시절이었다.


ㆍ70년대 중학생의 인권!!!




"학생 인권 조례"


학생들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각 지방단체 혹은 시ㆍ도 교육청에서 제정한 조례.




2010년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 학생들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오히려 선생님의 교권이 학생이나 학부모들로부터 심각하게 침해를 받는 시절이 되었다.

부모님들의 자식에 대한 과잉보호와 지나친 사랑(?)이 선생님에 대한 갑질로 이어져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실 관계를 떠나 선생님과 학생과의 관계에 부모님의 적극적인 개입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을 임금, 스승과 동격시 한다는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어느덧 옛이야기가 된 듯해서 씁쓸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70년대 나의 중학시절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학생들에게 인권이 어딨노!!!"

였던 시절이었다.



초등학생은 철 모르는 어린이로서,

고등학교 때는 신체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고 인격이 형성되는 청소년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중학교는 선생님의 상습적인 사랑(?)의 매질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사건 사고도 많고 말썽을 많이 피웠던 사춘기 시절이라 본인 잘못으로 체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냥 특별한 이유 없이 입시를 준비하는 중학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기합을 받았다.


중간이나 기말고사에서 학급석차가 떨어졌다고 반 전체가 받는 단체기합.

과목별로 기준점수 이하일 경우 담당과목 선생님에게 당하는 매질.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저번 시험점수와 비교해서 낮은 경우 점수차만큼 맞기도 하고.

떠들었다고 단체기합.

교과서나 준비물 챙겨 오지 않았다고 맞고.

그때는 머리가 빡빡이였는데 머리카락 길이가 길다고 또 맞고.

흰 운동화 신고 다니고 실내화 가져오지 않았다고 맞았고.

쌀이 부족해서 혼식과 분식을 강조하던 시기라 도시락에 보리쌀 혼합 비율이 낮다고 맞고.

여름방학 과제물(잔디씨 한 홉, 말린 아카시아 잎 1Kg, 퇴비 10Kg 제출하기, 쥐꼬리 제출하기 등) 미제출로 맞았다.

심지어 아무 잘못도 없이 3학년으로 올라간 기념으로 체육선생님이 모든 반 학생들을 때린 적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체벌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당연하게 부여받은 듯했다.


그렇다면 기합이나 매질의 정도는 어땠을까?

만약 그 당시 체벌 상황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SNS에 올린다면 지금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오래전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70년대 선생님들의 필수 지참물이 나무로 만든 체벌용 지휘봉과 출석부, 그리고 교과서였다.

남자 선생님의 경우 취향에 따라 체벌용 도구들을 특별히 제작해 쓰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의 중학생이면 중간고사나 기말 시험을 치고 나면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 손바닥들이 매와 멍자국으로 성할 날이 없었다.


더 억울한 것은 그렇게까지 부당하게 맞았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매 맞은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는 경우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은 선생님의 체벌을 불문곡직 자기 자식의  잘못으로 인한 것으로 인식을 했었다.

"네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선생님한테 이렇게 맞았냐?"며 오히려 부모님의 매를 벌었기에 병원치료가 필요치 않을 정도면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 멍자국은 교복으로 가릴 수 있어 부모님의 이중체벌은 면할 수 있었지만 70년대에 중학생시절을 보낸 나와 친구들은 인권 사각지대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ㆍ교회 입문(종교활동 시작)


초등학교 때 크리스마스이브 교회 행사에 한두 번 간 것을 제외하곤 교회에 가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산 중턱, 지붕에 십자가가 우뚝 서 있는 전도관 건물 있었다.

친구들과 가끔씩 전도관 근처에 가서 놀았지만 인적도 없이 늘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겨 무섭게 느끼기도 했다.

가끔씩은  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예배당에서 미친 듯이 기도를 하며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곤 했다.

나와 친구들은 치기 어린 마음으로 "전도관 미쳤네~ 전도관 미쳤네~~"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기독교에  대한 아무 지식이 없던 나로서는 교회와 전도관의 차이를 알 수가 없어 교회란 곳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정식으로 교회와 인연을 맺은 시점은 아마 1학년 중간쯤으로 기억이 난다.

큰 누나가 교회에서 대학생 주일교사를 할 때였다.

누나의 강한 권유도 있었고 중학생이 되니 주말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이 조금 지루해진 탓도 있었다.

교회에 다니는 학교 친구들도 있어 노는 겸해서 한 달에 두세 번씩 주말마다 교회를 찾았다.



그런데 교회생활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일요일 본당 예배를 마치면 학습관으로 가서 한 시간 정도 성경공부를 했다.

배정된 반에서 헌금을 내면 담임교사님이 출석부에 헌금 액수를 었다.

헌금액수는 성경공부반 친구들이 다 알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 반에 보통 3 ~40명 정도의 남녀 중학생이 있었고 헌금액수가 적았던 나로서는 괜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돈을 모아서 2주에 한 번 정도  교회에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나로서는 해소되지 않는 궁금한 점들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질문을 해서 목사님을 당황스럽게 하고 그로 인해 담임 목사님으로부터 때때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그만 다닐까 했지만 학업우등생에게 지급하는 교회장학금이 내 발목을 잡았다.


장학금의 지급조건은 이랬다.


첫째 교회에 6개월 이상 다닌 학생일 .

둘째 학기말고사 시험성적이 전교 5% 이내.

셋째 기독교 입문과정인 학습, 세례과정 중 학습과정면담을 통과한 학생.


장학금이 많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중학생의 한 학기 등록금은 족히 넘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첫째와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고 있었던 터라 큰 누나와 어머니로부터 교회 장학금을 신청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았다.

누나말에 따르면 교회에서 학습이라는 면담과정에 참가만 하면 누구나 통과가 된다기에 큰맘 먹고 학습 과정에 신청을 했다.


그때 학습면담과정은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 중 가장 창피했던 사건으로 꼽히지만

오기 하나로 통과했던 기억이 있다.


학습면담 당일.


오전에 친구들과 놀다가 점심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교회로 갔다.

예배당 1층사무실 부근에 학습면담과정 때문인지 그날따라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내가 처음  참가 조였고 이후로 계속 일정이 잡혀 있었다.

집사 할머니의  인도하에 면담장에 들어서니 남녀 중학생 20명이 앉아 있었고 앞에는 목사님이 계셨다.

개인별로 면담이 시작되자 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면담자였고 목사님의 질문에 개별적으로 답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참가만 하면 통과가 되는 의례적인 학습면담과정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돌아서 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2학년 봄으로 10개월 정도 교회에 다녔으니 기본조건은 통과였고 다음으로 본격적인 목사님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Q1) 신약성경이 몇 권인가요?


A) 네. 한 권입니다.(교회에 갈 때 늘 신약성경책 한 권과 찬송가 한 권을 갖고 다녔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는 생각에 씩씩하게 답을 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목사님과 참여한 남녀 학생들이 웃음을 참는 모습만 눈에 띄었다.


Q2) 그럼 성경이 모두 몇 권인가요?


A) 네. 두 권입니다.(신약성경 한 권, 구약성경  한 권. 교회에서 그 이상의 책은 본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목사님의 표정이 바뀌며 한심한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이어갔다.


Q3) 학생은 사도신경을 외울 수 있나요?

A)  "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도신경을 외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중략)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주기도문뿐이었다.

예배를 보면서 외웠던 것이 주기도문뿐이었으니 사도신경을 알 수가 없었다.


주기도문이 끝나자마자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목사님은 나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면담장을 나가라고 말씀하셨다.

순간 얼굴이 상기되며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민감한 사춘기 시절에 또래 남녀학생들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무안을 당한 것이다.

한마디로 쪽팔림 그 자체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한편이 아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고 괜히 화가 나기도 한다.


집사 할머님과 함께 면담장 밖으로 나왔다.

집사님은 애틋한 심정으로 나를 위로하며 학습면담 예상문답지를 건네주었다.

그때서야 학습면담 전에 문답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음 면담예정 학생들 모두 예상문답지를 공부하고 있었다.  

미리 이런 사항들을 알려주지 않은 큰 누나가 야속했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건네받은 문답지를 그 자리에서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고 다음 면담조에 다시 들어갔다.

목사님은 다음 기회에 하라며 또다시 나를 학습장 밖으로 내 보내셨다.

두 번째 퇴짜를 맞은 셈이었다.

왈칵 눈물이 솟기 일보직전이었다.

처진 어깨를 하며 나오는 나를 보며 집사님이 잠시 기다리라고 하시고 급히 면담장에 들어갔다 나오셨다.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으니 마지막 조 면담 때 다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계속 지켜본 집사님의 따뜻한 배려가 나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조로 학습면담과정을 통과해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관문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중학교 2학년 1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교회를 그만 다닐 때까지 매 학기마다 교회장학금받을 수 있었다.

물론 교회활동도 열심히(?) 했다.


농땡이, 일진(?)


"학생의 본업인 공부는 안 하고 친구들과 싸움박질이나 하며 말썽을 피우는 학생"


그때는 이런 부류의 학생들을 농땡이라고 불렀다.

요즘 말로 하면 한마디로 일진이다.

지금처럼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진 않았지만 어느 시절이나 학생들의 일탈은 있기 마련이다.

중학생이 되고 난 후, 친구로 같이 놀았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공부보다는 외모와 싸움실력이 중요하게 와닿는 시기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현금도 필요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삥을 듣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부터 중학교 친구들 사이에는 서서히 서열화가 시작된다.

학생 개개인의 가치관과 주관이 형성되지 않은 시점이다 보니 외모와 체격 그리고 싸움실력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와 서열의 기준이 된다.

거기에 우수한 학업성적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나는 조금 늦은 1학년 겨울방학 즈음부터 농땡이 한마디로 일진들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때 쌓은 싸움실력과 명성(?) 덕분에 중학교 1학년부터 별다른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더구나 6학년때부터 단짝이었던 별명이 "큰 돼지"인 친구와 함께 다니곤 했으니 같은 학년에선 우리에게 시비를 걸만한 패거리들 없었다.

돼지는 정육점 집 아들이었는데 점심도시락에는 언제나 고기반찬이 푸짐하게 들어 있었다.

90 Kg에 육박하는 몸무게와 큰 덩치 그리고 오랫동안 정육점을 한 집이어서 농땡이로 Top Class에 속하는 친구였다.


1학년 여름방학 무렵에 동네 친구들은 여중생들과 짝을 지어 본격적으로 단체만남을 갖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무리를 이룬 패거리들이 서열다툼을 시작하고 있었다.

각 학교별, 학급별  그리고 동네를 연고로 친구들의 다양한 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때부터 학생들 사이에서는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카더라 통신"에  떠돌기 시작했다.


"누구네 패거리가 시내 모처에서 다른 패거리와 붙어 작살을 냈다."

"A학교 누구가 강변 둑방길에서 일대 몇 싸움에서 이겼다."

"누구는 태권도를 해서 발 쓰는데 귀신이고 다른 누구는 무기로 칼을 쓴다."

"누가 싸우면서 흉기를 써서 정학을 당했다더라!"

여학생들 중에서는 누구네 패거리가 시내에서 일등이고 누가 제일 킹카라는 등 믿거나 말거나 한 온갖 이야기들이 학생들의 입과 귀로 두둥실 떠 다녔다.


2학기 초부터 시작된 일진들 간의 본격적인 다툼이 마무리되는 1학년 말쯤이면 각 학교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두세 개의 그룹들이 정해졌다.

그 이후 겨울 방학시즌동안 학교 일진들 사이 신경전이 또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은 서열다툼을 위해 치열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동네 뒷산에서 도토리를 따거나 강가에 가서 고기를 잡으며 놀곤 했다..

그마저도 놀 거리가 없으면 집 근처 초등생들과 같이 심심풀이 구슬치기나 짤짤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직 어린이  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동네에서 아이들과 놀고 있노라면 가끔씩 지나가는 초등학교 동창 여학생들과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괜스레 부끄럽고 어색해서 피하거나 미리 숨어 버리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한 일이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고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드디어 여학생들과 자주 만나는 동네 친구들이 초대를 했다.

해가 진 후 낙동강변 둑길에서 남녀학생 미팅이 있다고 했다. 친구들은 이미 짝이 정해진 상대가 있는 것 같았고 내게 여학생 짝을 소개해 준다는 것이었다.

여학생과 만남이 처음이라 쑥스럽기도 했지만 기대반 설렘반으로 친구들과 같이 강변 둑길로 깄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만치 여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동네친구들과 만나자마자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은 여학생들과  만남에 열중하느라 나의 존재는 아예 잊어버린 듯했다.

어색한 자세로 한참을 기다리다 못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주머니에는 마침 동네 초등생들과 같이 놀며 갖고 있었던 구슬이 주머니에 있었다.

구슬을 한주먹 움켜 잡고 친구들에게 던지며 욕을 해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지자 다음날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 내게 사과를 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카더라 통신을 통해 여학생 패거리 사이에 유명(?) 인사가 되어 버렸다.


"모 중학교 남학생 누구가 미팅을 나왔는데 아직도 애들처럼 구슬을 갖고 다니고, 대화에 끼지 못하자 화를 내고 구슬을 마구 던지더라!!!"


어쨌든  이후로, 동네 패거리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고 가끔씩 예상치 못한 일에 연루되기도 했었다.

"근주자적" (붉은색을 가까이하면 붉어진다.)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는 것처럼 2학년 여름 이후는 내게는 아슬아슬사건들이 많았다.

나름대로 원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절친인 큰 돼지와 싸운 넝마주이 왕초아들을 팼다는 이유로 양아치 패거리에게 끌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흰 양복과 백 구두를 입고 다니며 동네 친구들에게 삥을 동급생과 맞짱을 뜨기도 했다.

당연히 나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친구는 입안이 찢어져 병원에서 볼 안쪽을 몇 바늘 꿰매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친구는 지역 성인 조폭일인자의 조카로 알려져 잘 나가는 일진들 조차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세가 있는 친구였다.

하룻강아지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범을 물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일은 더 크게 확대되지 않았고 그 친구가 자기 패거리와 함께 내게 와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3학년 초에는  방과 후 반청소 도중 등뒤에서 습격을 받아 팬대에 찔린 적도 있었고, 1,810mm의 거구와 시비가 붙어 일촉 측 발의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다.

물론 팬대로 나를 찌른 친구(도루코를 씹어 먹는다는 독종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직접  사람은 없었음)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내게 혼이  났고, 거구인 친구는 사과를 받고 싸움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불가피한 몇 번의 싸움이 있었지만 대부분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 이후 내게 더 이상의 싸움은 필요치 않았다.

패거리에 소속되진 않았지만 시내에서  위세를 확보한 동네 친구들이 있었고 일진 패거리  사이에서 독보다이 맞짱으로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큰 위기에 처했을 때도 있었다.

사건에 연루된 3개 학교의 학생들이 대부분 정학이상의 징계를 받은 큰 사건이었다.

다행히 3학년 담임 선생님이 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나는 사건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밝혀 간신히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 국어 작문수업에 "지금까지 내 인생의 진로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사건이나 사람"에 대해 쓰라는 과제가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A학점을 받은 과목이었는데 중학교 3학년 때 겪었던 사건과 담임 선생님에 대한 글을 썼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힘들고 가끔은 두려운 순간들도 있었지만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의 도움으로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를 무사히 보내고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ㆍ싸움의 기술


싸움은 나쁜 짓이다?


평생을 살면서 남들과 다툼 한번 없이 무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겠지만 삶이라는 것이 늘 순탄한 것은 아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거나 스스로 몸을 지키는 호신용으로 잘할 것까지는 없지만 어느 정도 싸움의 기술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신체성장이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사춘기 시절에는 싸움실력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본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싸움의 결과는 의외로 단순하다.

특별한 경우나 무술로 단련된  특수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체격이 크고 힘이 센 사람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싸움의 기술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는 것중학교시절, 길게 잡아야 고등학교 1학년까지가 마지막이다.

그때까지는 싸움을 해 본 경험이나 기술 그리고 소위 말하는 깡다구 하나로도 웬만한 상대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쯤 되면 이미 일진들은 활동영역  즉 구역이 정해져 서로 싸울 필요가 없고 보통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 매 달리기 시작한다.

패거리들의 싸움은 중학교때와는 달리 고등학생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린다.

간혹 일진들이 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그때는 이미 그들만의 집단싸움이 되고 주먹을 쓰기보다 도구나 흉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싸움기술은 승패를 결정짓는데 큰 의미가 없어진다.


또 사회인이 되면 싸움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 그리고 경제적 능력으로 암묵적인 서열이 매겨진다.

과거 낭만파 주먹시대에 일대일 결투로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각색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럼 싸움을 잘하기 위한 기술은 있는 것일까?

싸움에서는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만의 법칙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싸움을 한 때가 언제였는기억은 없지만 사춘기까지 지지 않기 위한 나만의 싸움기술과 법칙이 있었다.


싸움의 기술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싸움을 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제압해 이기기 위한 싸움은 피해야 한다.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하는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면 무조건 내가 이겨야 되는 싸움은 없다.

그것은 깡패들이나 철없이 주먹을 휘두르는 망나니 들이 하는 짓이다.

약자의 편에 선다는 명분이나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니면 아예 싸우지 않는 것이 최고의 싸움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싸움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만 "이기면 영웅이 되고 지더라도 용기 있고 의리 있는 남자"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지피지기면 백전백태."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라는 뜻으로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객관적인 전력이 누가 봐도 열세인 상대와의 싸움은 애당초 피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돌쇠 체형으로 가슴팍이 두껍고 통뼈인 친구, 이런 친구들은 실컷 맞고 나서도 죽을 때까지 저돌적으로 덤벼 드는 피곤한 스타일이다.

어릴 때부터 합기도나 유도, 권투  요즘으로 보면 격투기를 배워 중학교 때 이미 유단자인 친구,

어릴 때부터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친구.

이런 친구들은 친하게 지내며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친구로 곁에 두는 것이 최고다.

그리고 상대방도 나를 그런 상대로 느끼게 해야 한다.

괜히 부딪쳐봐야  서로 득이 될 게 없는 상대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세 번째.

환경이 바뀔 때  가장 먼저 싸움을 하고 선제공격은 필수.

중학교 때는 학기 초 동급생끼리 싸움을 많이 하게 된다.

학급 안에서 그리고 학년 내에서도 반별로 주도권 다툼시작되는 것이다.

전 학년에서 친했던 친구들은 은근히 그 친구가 초반에 강력한 한방으로 반 분위기를 장악해 주길 바란다.

친구가 반에서 짱의 반열에 오르면 여러모로 일 년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기대를 무시할 수 없는 법.

학기 초부터 사냥감을 고르기 시작하고 일단 정해지면 예의주시하며 싸움을 할 시점을 노린다.

사냥감  대상으로는 일단 어느 정도 키가 크도 덩치도 있는 친구.

주변 친구들의 위세를 업고 반에서 약한 애들을 괴롭히는 친구.

그런 부류의 친구들은 오버 액션은 과하지만 대부분 실전경험이 없어 초기 선제공격으로 쉽게 제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싸움시기는 그 친구가 설치는 시기가 빨라질수록 의외로 일찍 다가온다.


그 친구로 인해 반 분위기가 나빠질 무렵 정의의 사도(?)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악을 좌시할 수 없다는 명분아래 전체 반 친구들이 지켜보는데서  싸움은 시작된다.

거친 욕설이 오가지만 싸움은 대부분 일분을 넘기지 않는다.

나의 선제공격이 시작되면 상대는 그 즉시 더 이상 저항을 할 수가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대부분 악당에게 선공을 내어주고도 승리를 하지만 그것 역시 영화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선제공격은 강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본인이 약자거나 비슷한 전력이라는 판단이 들 때는 쉽사리 선제공격을 할 수가 없다.

먼저 선수를 친 싸움에서 졌을 때의 결과가 두렵기 때문이다.


지기보다 셀 거라 내심 생각했던 상대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하면 대부분은 초반에 전의를 상실해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그때가 되면 주변 친구들이 싸움을 말리게 되고 드디어 정의의 사도는 쉽게 승리를 하게 된다.


승리의 과실은 달콤하다.

큰 변수가 없으면 싸움 한 번으로 일 년 동안 친구들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다.

맛있는 도시락 반찬을 먹을 수 있는 권리,

맛난 반찬이 있으면 친구들이 먼저 가져다준다.

훔친 물건 상납,

중학생시절 가게에서 훔친 물건들을 친구들에게 파는 애들이 종종 있었다.

문방구에서부터 과자류, 신발, 체육복, 쥐포와 오징어 등 갖가지 종류의 물건들이 있었다.

판매 허가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물건을 팔기 전 그 친구들은 가끔씩 내게 성의표시를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네 번째.

지형지물을 이용.

비슷한 조건을 갖춘 경우에는 적절한 지형지물을 이용해야 한다.

전쟁에서 지형지물을 활용해 적은 수의 군대로 대군을 파하거나 단지 위협적인 무기사용을 과시함으로 싸움을 끝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키나 체격이 큰 사람과 싸울 때는 상대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교단이나 책상 위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고 트인 장소인 경우라도  가능한 한 계단이나 경사로 위쪽에 있는 것이 최선이다.

그 당시에도 학생들에 따라 간혹 흉기를 사용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그에 대한 대비도 필수적이었다.

주변에 사용가능한 것들을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기본이었다.


다섯 번째.

실전경험과 부단한 연습.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부단한 노력과 실패에 따른 경험의 반복만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이다.

싸움도 마찬가지다.

이미 말한 네 가지가 중요하지만 싸움의 기본실력과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1% 정도 비율로 타고난 싸움꾼도 있겠지만 자주 맞아 보울기도 하면서 근성을 키운 사람들이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때부터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하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실력과 근성을 쌓았고  동네 형들과 근처 산을 앞마당 뛰어다니듯이 놀았다.

그러다 보니 체격이 크진 않았지만 몸놀림이 좋았던 것 같다.

중학교 때는 우리 집 마당에 맷돌과 블록을 매단 역기와 줄넘기, 이소룡의 주 무기였던 쌍절곤 그리고 새끼줄을 동여맨 나무가 있었다.

운동 겸 싸움연습을 위해 내가 손수 만든 것이었다.

경험을 넘어 훈련이 필요했고 심심할 때 밤마다 혼자 단련한 덕에 사춘기였던 중학교 시절을 순탄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옛날 사진들을 꺼내 보면서 정리를 할 때가 있다.

희귀 자료인 돌 사진 한 장, 초등학교 때 사진도 여러 장 있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단 두장, 졸업식 때 찍은 사진뿐이다.

고등학교 이후부터는 사진이 많아진다.

아마 사진촬영이 흔해진 탓도 있겠지만 남기고 싶은 추억이 많아졌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사건 사고는 많았지만 그리 깊이 간직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 있었던 시절,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기에 진로의 첫 단추가 채워졌던 때가 중학교 시절이었다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작가의 이전글 송구영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