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언어 안에서만 세계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언어 밖에서 존재를 사유하거나 드러낼 수 없으며,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머무는 근원적 터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이걸 조금 확대해석하고 과장하고 곡해해서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렸다 ;
나는 이 말을 ‘언어는 생각의 집이다’로 잘못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마르틴 하이데거가 '인간의 사유는 언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라고 본 맥락 때문에 헷갈렸던 듯하다. 이 맥락에 따르면 인간의 사유가 곧 존재라는 말로도 들린다. 나는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란 확실히 낯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너 생각이 없니?’라는 표현을 모욕으로 쓰고 있으니,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셈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문장으로 돌아와 보자면, 이 말의 원래 뜻은 아무래도 언어라는 것이 곧 사고방식의 프레임이 된다는 의미인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뒤늦게 수능 준비를 한답시고 꽤나 비싼 영어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의 그 과외 선생님이 앞으로의 내 삶에 여러모로 쓸모 있을 법한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다고 나는 확신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런 내용이었다.
'영어 문제를 풀다가 시간이 없다고 느끼면, 지문의 맨 첫 문장과 맨 끝 문장, 그리고 단락별 첫 문장과 끝 문장만 읽어내면 대부분 답을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영어는 한국말과 달라서 결론을 일단 제일 앞에다 때려 박고 시작한다는 거였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면, '나는 끈기가 부족해서 글 쓰기를 싫어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한국말로 쓰인 문단이 있다면, 영어로는 '나는 글 쓰기가 싫다. 왜냐하면 내가 끈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의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다. 내용적으로 같은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전개의 순서가 매우 다르다. 아무래도 글은 생각을 담는 것이기에, 전체적인 흐름과 구성은 결국 쓰는 이의 사고방식에 따라서 직조된다는 주장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흔히들 서양은 실용주의적이고 거시적 관점을 가진다고 표현하는 반면, 동양은 은유적/비유적이고 미시적 관점을 가진다고들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런 것들이 모두 언어의 차이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이 말에 적극 동의하는 나는 심지어 비언어적인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는 수준이다. 나는 언제나 생각을 한답시고 한국말로 된 문장부터 머릿속에 떠올린다. (사유는 언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내가 쓰는 언어 체계가 결론을 가장 마지막에다 빼놓는 구조를 취하므로, 결국 나의 사유 또한 여기저기 빙빙 돌다가 제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통찰을 이룬다는 걸까? 그렇다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은 단박에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 아마 그런 뜻은 아닐 테고.
우리와는 생각의 출발 지점이 다르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우리 말로는 ‘이게 뭐지? 내가 왜 이럴까?’하는 식의 모호함으로부터 사유가 시작된다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흠, 지금 이렇게 된 상황이군.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라는 식의, 현재 상태에 대한 결론으로부터 사유를 촉발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한국어로 사유하는 법을 배운 자이므로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사유하는 사람들의 방식을 그저 짐작만 해볼 따름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하이데거에 따르면 나라는 존재는 복잡하고 어지럽게 뒤엉킨 실타래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셈이다. 내 말은 항상 너무나도 뒤죽박죽, 엉망진창, 꼬불꼬불하니까. (한국어가 그렇다는 게 아니다. 내가 쓰는 한국어가 그렇다는 뜻이다.) 이렇게나 뒤죽박죽 된 집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어떻게 올바르고, 똑바르고, 평평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말을 좀 쭉쭉 펴서 나란하게 잘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가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주관적인 언어 사용 방식’을 뜻한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알지만, 나는 이 명언이 어째 자꾸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 '말 좀 똑바로 하라'라고.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나는 입만 열면 자기 비하를 하고 무언가를 원망하고 스스로를 비관하니, 그런 집에서 사는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 좀 똑바로 하라고 내 주둥이를 비난하고 싶어진다.
유난히 언어를 유창하게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함축하는 단어나 숙어, 의성어, 의태어 등을 적재적소에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이다. 언어가 유연한 사람들은 생각도 더 구체적일까? 반대로 자기 생각을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사고의 폭도 더 좁은 걸까?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 나와 한참 사소한 걸로 입씨름 같은 토론을 벌이던 지인이 나를 두고 ‘파시즘’이라고 했다. ‘파시스트’도 아니고 ‘파시즘’이라고 나를 지칭했다는 뜻이다. 그 단어의 의미나 입씨름 같은 토론 과정에서 내가 펼쳤던 주장, 그리고 나의 말하기 방식이 어땠는지까지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나는 ‘내가 파시즘의 화신이라니, 이건 너무 과한 평가(?)인데...’라는 이상한 문장만 번뜩 떠오르며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선 그냥 사소한 말실수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 때문에 이 사람의 사고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를 명확하게 ‘파시스트’라고 불렀으면 더 반박을 했으면 했지 적어도 답답한 마음은 안 들었을 것 같다. ‘뭐라는 거야, 내가 파시스트라면 이 세상에 파시스트 아닌 사람이 없어. 그냥 너의 말이 정말 설득력이 없는 거겠지. 내가 옳아’하고 우기면서 넘길 수 있었을 텐데, ‘넌 파시즘이야, 이 파시즘아’라고 하니까 내 말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전달되었던 것인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내가 말싸움을 할 상대를 잘못 골랐구나… 말이 안 통하는구나….
사실은 내가 펼쳤던 주장의 내용을 놓고 봐도 그렇다. 내가 ‘파시즘’이든 ‘파시스트’든 그런 명칭으로 불릴 만큼 극단적으로 민족주의적인 발언을 했던가? 아니오. 권위주의적으로 독재를 펼치고자 했는가? 아니오. 군사력 증강을 숭배하고 전쟁과 폭력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발언을 했는가? 아니오. 자유민주주의와 다원성을 부정했는가? 아니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나를 ‘파시즘’이라고 불렀는가? 모르겠습니다. 그는 분명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비꼬기를 그만두고 그냥 일반적으로 그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통해서 유추를 해보자면, 아마도 상대방은 나를 '본인의 의견은 무시하고 내 의견만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당시에 내가 정말 지나쳤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갑자기 ‘파시즘’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는 그냥 세상 한 귀퉁이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서 별 것 아닌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쓰잘데기 없는 주제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자신의 의견이 원하는 대로 관철되지 않는다고 해서 갑자기 나를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싶어 졌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무척 유아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의 ‘존재’가 어떻게 그려지고 어떻게 수정되어 가는지를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본인만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맞서왔지만, 나는 그 토론 같은 대화 내내 그를 ‘파시즘’이라든지 ‘파시스트’라는 단어와는 머릿속으로도 엮어본 적이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사람이 나를 ‘파시즘’으로 봤다는 건, 문득 자기 머릿속에 그게 떠올라서다. 내가 나 자신과 직접 입씨름을 벌여보지는 못했으니, 정말로 내가 그를 무척 불쾌하게 했는지 어쨌는지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다만 두 가지 확실한 것은, 1. 나는 내용적으로 파시스트적인 발언을 한 바가 전혀 없으며 2. 나는 정말로 그 말이 어울리는 정치인이 아니고서야 타인을 그런 식으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내게 그날의 토론은 그간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의 진짜 사고방식(부정적인 의미에서)이 언뜻 엿보이는 순간으로 남고 말았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그의 집도 내 집만큼이나 비뚤어진 것 같다. 우리 둘 다 언어에 좀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이런 사소한 단어 하나만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판단해 버리는 나 또한 무척 부족한 사람이지만, 세상에 나만큼 부족한 사람이 또 없으리라는 법이 없다! 어렵게 얻은 상대방의 마음을 잘못 선택한 말 한마디, 단어 하나에도 몽땅 잃을 수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너무 쉽게 쌍욕을 내뱉지 말자(파시즘이 쌍욕이라는 건 아닌데). 실제 내 삶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 존재만큼은 좀 궁궐 같은, 대궐 같은 집에 살게 해 주자. 나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다들 나의 존재가 악취 나는 꼬부라진 집에 사는지, 훌륭하고 멋진 기와집에 사는지를 말 몇 마디만 섞어보고도 판단할 수 있고 또 분명 판단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비극적 이게도, 역설적이게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언어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계속 성장하기 위해 생각도, 언어도, 정진해야 한다고 하겠다. 그래. 맞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