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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현모 Jul 28. 2016

몇 가지 정리

오랜만이야, 브런치

Alternative


왜 미디어를 하는가


사람들에게 대안적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다.

사회엔 많은 문제가 있다. 고졸 차별 문제, 화석연료 문제, 정치와 시민의 양극화 등 많은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디어, 시민단체, 전문가 등 여러 집단이 노력을 해야 한다. 문제의 기승전결이 있다면 우린 각각을 연결할 수 있다. 현재의 언론은 정파, 지역 등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다. 설령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기존 방식으로만 한다. 궁극적으로 뉴스를 보며 기존의 문제를 만나고, 대안적 가치를 보고 이를 행동으로 이끌어 정치적 해결 방안을 제안하자가치를 보고 느끼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이끌자.


문제? 가치관


그렇다면 기존의 문제는 무엇인가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


현재의 정치는 유력 정치인 위주의 계파정치, 시민과 유리된 엘리트 정치다. 정치인들은 대중에 영합할 줄만 알지, 대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다. 고민하는 정치인은 언론에 조명받지 못한다. 시민단체는 지루하며 이를 다루는 언론은 그저 기사 말미의 취재원으로서만 소비한다. 대안을 논하고 해결을 이야기해야 하는 정치는 그저 전쟁터만 됐다.


인정받지 못하는 인권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빈곤층, 비한국국적 사람 등 사회의 기득권과 기성계층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현재 인정받지 못한다.

제도적 차별 철폐 : 90년대 후반 도입된 남녀동일임금법 같은 법의 제정과 동성혼 등


극복하지 못하는 교육


교육은 기존 관료 및 포디즘 위주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기다. 빈부의 격차를 넘어서는 사다리, 국민이 아닌 시민을 만든느 교육이 되지 않는다


평가받지 못하는 노동


3D서비스업, 가사노동은 동일한 노동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월급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 사이엔 신분제가 있어 그 신분제에서 하층 신분을 맡고 있다. 동시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제 역시 또다른 신분제를 낳으며 약자 구도에 있는 사람들의 노동을 비천한 것으로 만든다


무시 당하는 대안적 삶


채식지향, 동거, 선택적 비혼 등 기존 1980~90년대 가부장제에서 허락되지 않던 많은 삶의 제도가 나오나 여전히 '신기한' 뉴스로만 다뤄지고 있다. 그 삶의 형식이 왜 필요한지,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줬는지 논하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성, 미래 가치가 무시당하는 구조


 이 모든 문제는 다양성이 무시당하기 때문이다. 중화학 제조업, 남성, 대학 등 기존의 제도가 새로운 가치관을 무시한다. 기존의 제도 및 가치관이 미래에도 적합하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 대기업은 스타트업에 의해 언번들링 되며, 기존 대기업의 영역은 힘은 있지만 가치가 없어지고 있다. 물적 토대가 바뀌니 다른 토대도 바뀐다.

 

사회의 방향은 욕망이 정한다. 욕망이 규제된 사회는 발전하지 못하며 도태된다. 이 점에서 공산주의보단 자본주의가 우월하며 독재보다 민주주의가 낫다. 당연하게 다원주의를 지켜야 한다.


언론사는 현재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만 언론사 자체가 기득권이기에 한계가 있다. '언론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급진적인 해결책을 이야기하지 못하며 광고주 등 현실 이해 관계와 얽힌 사람들을 비판하지 못한다.


저신뢰사회


언론이 정파적이며 학계 역시 능력이 부족하고 기업은 투명하지 않다. 여러 환경으로 인해 사회의 신뢰 수준이 너무 낮다. 저신뢰사회는 정석보다 편법이 넘치며 편법은 반칙을 낳고 반칙은 오류와 저신뢰를 낳는다. 저신뢰사회에서 개인은 소비력, 폭력과 같은 힘만을 추종하게 된다. 이는 다양성보다 일원화된 가치를 따르게 하며 결국 다른 억압을 낳는다.


미래가 없다


미래는 있지만 이 가치관엔 미래가 없다. 이 가치관만 논하는 사회는 더더욱 미래가 없다. 현재의 문제에 얽힌 사람을 보여주고, 문제를 개괄하고, 미래에 대한 대안을 이야기하고 제시하며 궁극적으론 정책입안자와 시민을 연결해주거나 시민 스스로 이야기하게끔 만드는 미디어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안적 가치관이란?


평등하고 다원화된 민주주의, 패자부활이 보장된 자본주의, 덜 억압적인 사회. 


예시를 들자면 약자도 배려하게끔 디자인된 도시


미래 사회는 다원화된 개인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 정부 관료가 사회의 방향을 제안하지 않고, 시민들이 스스로 모여 가치관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논하고 방향을 제안해야 한다. 정치인은 시민과 쌍방향으로 대화하며 제도를 만들며 기업은 다원화된 시민의 욕구와 사회의 필요를 반영해 가치를 만든다.


할 수 있는 건?


이 과정에서 미디어는 개인을 다원화되게끔 뉴스를 제공하고 '여러가지 작은 승리'를 느끼게 하기 위해 콘텐츠로 시민의 행동방향을 제안한다. 정치인과 시민을 연결하기 위해 시민들이 사회에서 겪는 문제의 해결방안을 우리가 조직해 정치인에게 제안하거나, 정치인과 협업한다.


시민은 필요로 할까?


당장 필요로 하진 않는다. 우리는 내일 뭐먹지를 고민하지만 10년 뒤의 우리를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해야 한다. 미디어의 책임은 발끝이 아닌 지평선 너머를 논하는 것이다. 예견된 미래 변화 앞에서 가만히 있는 건 미디어의 책임방기다.

 

가치가 있을까?


인간은 한계와 마주하며 살아간다. 아기는 수천번 넘어지며 걷는다. 넘어지는 한계를 넘어 걷는 지평을 마주한다. 대안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비판받을 지점이 많다. 채식지향은 한계가 있으며 페미니즘은 여태껏 혁명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화석연료 없는 녹색성장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하지만 이 한계를 인지하며 대안을 고민하는 것은 그 어떤 행위보다 인간적이다. 한계에 갇혀 살 것이면 우리는 1살 때 모두 숨을 거두어야 한다.


미디어는 문제를 보여주고 해결책을 논한다. 문제는 이 사회의 한계이며 해결책은 한계를 넘어선 무언가다. 즉, 언론의 궁극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시민을 데려가는 것이다. 그 해결책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 세상에 현자가 없는 것만큼 모든 해결책은 불완전하다. 


하지만, 언론 없는 정부가 폭주할 것처럼 해결책 없는 언론 역시 비평에 그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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