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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Apr 16. 2024

고음불가 주인공의 피날레

내 약점이 당당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 "


 


이 노래의 가사를 들으면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그 이상인 사람들은 하나의 CF를 머릿속에 떠올릴 것이다. 내가 학생이던 시기 이 CF는 히트를 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CF를 패러디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CM송은 오페라 리골레토 중 3막에 나오는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을 원곡으로 하고 있다. 이 노래가 특히나 나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학창 시절에 강렬한 추억을 남겼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다양한 활동들을 하며 성장했는데 그중 하나가 연극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지만 한때는 연극배우를 꿈꿨을 정도로 연극에 진심이던 시기가 있었다. 연극은 마치 내 안에 숨겨진 나를 꺼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나는 연극이 끝난 다음에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너무 좋았다.




학교에서의 연극은 전문적인 극단의 공연과는 당연히 거리가 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선배들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스스로 학습하는 형태의 동아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 당시 열정이 넘쳤던 우리들은 기존의 연극의 틀을 과감히 깨부수자라는 마음으로 사극에 뮤지컬을 가미한 형태의 극본을 작성하기로 했다. 그래서 사극이지만 곳곳에 음악과 유머 요소를 넣은 말 그대로 퓨전 춘향전을 교내 첫 공연에서 선보이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당시 운이 좋게도 나는 주연인 춘향이 역할을 맡았었는데 마지막에 이몽룡과 CF 패러디를 해야 하는 장면이 있었다. 무엇이 문제냐고 궁금해할 텐데... 나는 사실 음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음정은 괜찮은 편이지만 고음이 되지 않는 고음불가였다. 이 CM송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앞부분은 비교적 잔잔한 음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CF의 마지막 부분에 남자의 진심을 알게 된 여자가 승낙을 할 때 고음이 절정에 이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고음을 해야 한다는 것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음악 시간에 했던 가창 시험에서 고음 구간에 크게 삑사리를 낸 이후 노래는 내 인생과 친해질 수 없는 존재였다. 아니, 그런데 연극에서 노래라니. 그것도 고음을 해야 한다니.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미 배역이 다 정해졌고 연습이 들어간 상태라 어떻게든 해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 좋아요 가요오호호호... "




프로포즈를 승낙하는 부분인데 전혀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감당하기에 너무 높은 고음이라 '좋아요 가요'라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계속된 실패와 삑사리로 포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한 가지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가성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소리가 조금 작아지기는 하겠지만 가성으로 자연스럽게 음을 올리면 고음 비슷하게는 낼 수 있었다. 가성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연습을 했고, 드디어 본 공연날이 다가왔다.




주인공이었지만 극의 흐름상 나는 연극의 중반부터 등장할 예정이었다. 다양한 코미디적 요소가 있는 터라 대사뿐만 아니라 이동 동선부터 행동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 연극이었다.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다른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가 예상한 포인트에서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환호를 지르며 공연을 함께 즐겨주고 있었다.




드디어 연극이 중반으로 넘어가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감춘 채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몇 개월간 준비한 연극을 하며 함께 한 동아리 부원들과의 최상의 호흡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역시 나는 실전에 강한 편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니 출처가 어디인지 모를 에너지가 샘솟기 시작하고 자신감도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열정을 분출해 그동안 준비했던 연극을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피날레가 다가왔다.




" 아니 그럼 지금 결혼하잔 얘기? 좋아요 가요 오오... 호호....!!!!!! "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극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성을 사용한다는 전략을 잊고 말았다. 내 목소리로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목소리가 처참히 갈라지며 삑사리를 크게 내고 말았다. 순식간에 내 얼굴을 창피함으로 새빨개졌다. 하지만 연극 중간에 무대 뒤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관객석을 가득 채운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




" 푸하하 하하하하 - "




사람들의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금까지 연극을 진행하면서 나왔던 웃음소리 중 제일 큰 소리인 것은 틀림없었다. 다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웃으며 박장대소했고, 어떤 친구들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옆 친구를 때려대기도 했었다. 내가 실수를 했는데, 사람들은 재밌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연극은 마무리되었다. 연극이 끝난 다음 가장 걱정한 것은 나의 삑사리를 본 사람들을 어떻게 마주 보는가였다. 나의 실수로 인해 연극을 다 망쳐버린 것은 아닌지, 어릴 때의 트라우마가 다시금 나를 그 시절로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 너 아까 삑사리 일부러 낸 거지? 웃기려고? "




무대 뒤에서 본 사람들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은 내가 웃기기 위해서 일부러 삑사리를 냈다고 생각했다. 삑사리 덕에 공연이 더 재미있고 웃겼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정말 삑사리가 난 거였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나의 약점을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 오히려 나를 더 빛나게 만들어 준 경험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약점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리고 그 약점으로 인해 원치 않는 트라우마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가진 약점을 숨길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 나는 이런 약점을 가졌어. 어때? 웃기지?

그래서 뭐 어때? 이것도 나의 모습 중 하나야.




때로는 약점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다. 나의 실수를 도와주는 좋은 인연을 만나게도 하고, 생각하지도 못한 새로운 경험으로 나를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누군가 물어보기도 전에 오히려 먼저 난 이런 약점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주변에 떠벌린다. 누군가는 이런 약점을 가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약점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내 약점이 드러나는 것에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진 약점도 나의 일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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