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홍콩 최고의 체코 맥주, <피보 체크 바>

2022년 6월 30일 목요일, 내일은 홍콩 주권반환 25주년 기념일이라 휴일입니다. 저야 연구원이니 주말이 따로 없습니다만, 새로 이사한 사무실이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공사에 들어가는 통에 강제 휴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내일도 대학 도서관에 출근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홍콩에는 '태풍 경보 1호'가 내려졌을 정도로 폭우가 심하게 오는지라, 야외활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갈 데가 없으니 할 수 없이 직장에 나올 수 밖에요. 생각해 보니 서글픕니다. 오늘 저녁 6시부터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저는 5시 45분에 사무실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귀가할 수는 없습니다. 비를 절대 맞을 염려가 없는 곳으로 "고독한 미식가" 놀이를 떠나야 할 때입니다. 어디를 가볼까요? 문득 홍콩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C가 제게 권해준 체코 술&음식 전문 레스토랑이 떠올랐습니다. 홍콩에는 체코 전문 바가 거의 없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체코 친구가 권해주는 "진짜배기" 체코 스타일 레스토랑이라는 겁니다. 그곳은 홍콩에 거주하는 체코인들의 아지트이자 집결지라고 합니다. 그만큼 체코 스타일을 제대로 구현해낸다는 것이겠지요. 저는 다음주 금요일인 7월 8일에 출국하며, 목요일은 홍콩 생활을 마무리하는 뒷정리를 해야 하므로 따로 맛집을 탐방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태풍으로 인해, 제 홍콩 마지막 일주일 계획에 상당한 수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비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내릴 때에 어디든 최대한 탐방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곳에서 혼자 부어라 마셔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해피 아워 시간에 방문해서 딱 한 잔만 하고 다시 학교로 복귀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있는 홍콩시티대학에서 오늘 방문할 <피보 체크 바 Pivo Czech Bar>가 있는 구룡 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2번 갈아타야만 합니다. 총 이동시간은 40분 가량입니다. 이 정도면 서울 시내에서는 아무것도 아닌데, 홍콩에서는 참으로 귀찮고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 거리입니다. 지하철을 두 번씩이나 갈아타야 하다니...그래도 해피 아워가 3:00~7:00 PM까지인데 6시가 넘어 출발했으니,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퇴근 지하철 안에서 이래저래 시달리며 가까스로 구룡 역에 도착했습니다. 구룡 역과 연결된 <엘리먼츠 ELEMENTS> 쇼핑몰 내에 오늘의 목적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인지, 구글맵만으로는 그곳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 이럴 때에는 결국 <엘리먼츠> 야외에 그 술집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까지 왔는데 또 안 갈 수도 없었습니다. 궁시렁거리며 구글 이미지와 유사한 장소를 찾으라고 우산과 스마트폰을 들고 어리버리 헤매다가, 아뿔싸, 물구덩이에 첨벙! 발을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진성으로 욕설이 튀어나왔습니다. 6월의 홍콩은 장마철이라, 빨래가 마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냥 빨래도 아니고 구두라니요! 출국 일주일 전까지 비를 맞지 않고자 그렇게 조심했는데, 엉뚱하게 술집을 찾다가 아주 물웅덩이를 밟아버렸으니 정말로 눈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 때부터 제 기분은 이미 다운된 상태였습니다.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더니, 오늘의 목적지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 다소 당황했습니다. 저는 홍대의 <캐슬 프라하> 같은 중후한 분위기에 조명이 무척이나 어둡고 드라큘라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예상했었거든요. 

<홍대 캐슬프라하>

그런데 홍콩 구룡반도의 정통 체코 레스토랑인 <피보 체크>는 센트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하고 세련된 바였습니다. 쉽게 말해, 체코에 대해 제가 가진 선입견에는 맞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매우 매력적인 바이브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입장했더니, 이미 손님들로 가득해서 BAR에서조차 제 한 몸을 앉힐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분위기는 매우 흥겨웠는데, 신발을 물에 빠뜨려 잔뜩 삐친 독거노인에게는 지나치게 소란스럽게 들렸습니다.  

일단 점장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홍콩 중년 남성에게 다가가서, 딱 맥주 한 잔만 하고 갈 건데 테이블에 앉아도 되냐고 물어봅니다. 비록 손님이기는 하지만, 피크 타임 때에 맥주 한 잔 시키고 테이블을 차지하는 것은 상도에 어긋난다고 여겨서입니다. 하늘색 와이셔츠를 빳빳하게 다려 입은 신사는 흔쾌히 저를 위해 테이블 하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착석하고 나서 보니, 제 옆에도 아랍계 젊은이가 혼자 앉아 술을 홀짝이고 있었습니다. 11시 방향의 인도계 직장인 두 명 또한 4인 테이블을 차지하고 맥주를 여유롭게 마시고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소심했던 것일까요? 

그래도 체코 술집에 왔으니, 코젤 생맥주를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주문을 넣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맥주를 기다리는데, 손님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올 수 없는 곳인가 봅니다.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자꾸 레스토랑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가 자리가 없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자꾸 미안해집니다. 이렇게 소심하면 안 되는데 말이지요. 

휴,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인 코젤 '나마 비-루'가 나왔습니다. 거품의 양이 적당하고 색깔이 무척이나 영롱합니다. 비록 컵받침을 늦게 내오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코젤 생맥주를 홍콩에서 먹을 수 있으니 개의치 않았습니다. 홍콩에서는 제 눈 앞에 있는 테이블처럼 목욕탕 타일 문양의 디자인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 봅니다. 아, 역시 개운하고 깔끔하니 아주 좋습니다! 구정물에 발을 담궜던 충격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에는, 역시 술 한 잔 들이키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죠. 저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편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tot(독한 술 한 모금 분량)를 즐깁니다. 왜냐하면 한 모금씩 홀짝거리며 입 안에서 술을 천천히 굴려야만 참된 맛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우리 코젤 생맥 친구는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매우 맛있습니다. 

 제 앞에 서 있는 젊은 직장인들은 술이 아닌 논알콜 음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요리를 즐기는 모습은 보이지 않네요. 시간이 이른 모양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제 마음 한 구석이 마냥 즐겁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는 홍콩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서야 제 스타일을 어느 정도 확실히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구룡반도"에도 "센트럴"에도 속하지 않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제게 "구룡반도"란 홍콩 로컬들의 고된 삶과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한편 "센트럴"은 서구화된 자본주의적 시티라이프를 뜻합니다. 그리고 홍콩을 찾는 관광객의 대부분은 홍콩을 "센트럴"적 스타일로 이해합니다. 구룡반도에서 로컬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죠. 대부분 금융업계에 종사하거나 관광객 또는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학생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10개월 가까이 구룡반도의 에어비앤비 숙소를 전전하며 로컬들의 삶 속에 섞여들었다는 점에서 특이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시티라이프를 선호하는 사람입니다. "구룡반도"는 절대 제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센트럴"의 삶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물질적이며, 무엇보다 지나치게 시끄럽고 번잡합니다. 저는 깨끗하고 고급스럽되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비싸지 않고 적당히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원했던 것이지요. 어제 방문했던 침사추이의 이자카야가 제가 가장 선호하는 스타일이었던 셈입니다.   

제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니, 이제 이 곳에 더 이상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계속 밀려드는 손님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제 마음을 편하게 할 듯합니다. 그래서 결제를 마치고 일어섰습니다. 해피 아워 가격이 적용되었는지라 서비스 차지 10%가 붙었는데도 HKD75로 마무리했습니다. 

비에 젖어 아름다운 여러 레스토랑들을 뒤로 하고, 마천루들이 내려다보는 구룡역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깁니다. 몇 년 전에는 저 빌딩 가운데 한 곳에서 며칠을 묵었더랬습니다.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던 지하철역에 마음 편히 입장하니, <엘리먼츠>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고급 주택 단지가 밀집해 있는 이 구룡역은 본디 제가 사는 숙소에서 걸어서 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며칠 동안 폭우가 내리는지라 결국 지하철로 올 수밖에 없었네요. 오늘은 역마살이 꼈는지, 아침부터 장국영 님을 영접했다가 저녁은 체코 생맥주로 마무리했네요. 맥주를 두 잔 했으면 술에 취해 글을 쓰지 못할 뻔했습니다. 적절히 한 잔을 먹고 일어난 제 자신을 칭찬하며, 주권 반환기념일을 하루 앞둔 포스팅을 여기에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콩 침사추이 최고의 태국 레스토랑 <아속 타이 가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