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 서울에서 속초까지 당일치기로 "껌 사러 가는" 라이딩이 유행 중이라고 합니다. 보통 경의중앙선 용문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여 속초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간 뒤, 식사하고 껌 한 통을 산 뒤 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귀경하는 코스입니다. 저는 21년 당시 이런 당일치기 여행에 매우 끌렸지만 홍콩에 연구원으로 나가야 하는 관계로 자전거를 사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1박 2일 용문-속초 도보여행을 준비했지요.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 용문에서 홍천까지 도보여행을 시도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본디 용문에서 신남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서 숙소에서 1박 한 뒤에 이튿날 속초까지 가는 것이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홍천 곳곳에서 도로 공사가 진행되는 바람에, "도보로" 그곳을 통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였지요. 그래서 아쉽지만 홍천에서 간단하게 요기한 뒤 귀가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홍콩에서 1년을 보낸 뒤 복귀하고 시간이 흘러 이제 2023년 4월입니다. 마스크 착용이 사실상 해제됨에 따라, 곳곳에서 여행붐이 불고 있고 날씨 또한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지난 여행에서 얻은 교훈과 팁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행 계획을 새로 짜서 4월 마지막날인 일요일에 다시 출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우선 용문역에서 홍천까지 걸어보니, 주변 풍경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원래 도보여행의 장점은 자동차나 시속 30km 이상 내며 달리는 로드바이크(대략 싸이클자전거)로는 즐길 수 없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것인데, 주변 풍경이 삭막하다면 그닥 재미가 없지요. 사실 서울에서 속초까지 가는 여행의 묘미는 "인제" 정도 가야만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제시외버스터미널 또는 그보다 더욱 속초에 근접한 버스터미널에서부터 출발해야 도보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속초나 양양 가는 시외버스 노선에 대해 제법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잡은 4월 30일 여행 코스는 원통시외버스터미널에서부터 속초시외버스터미널까지 이르는 44km 구간의 여행입니다. 마라톤 코스(42.195km)보다 조금 더 긴 수준이지요. 하지만 도로가 통제되고 잘 짜여진 마라톤 코스와는 달리, 도보여행을 위해 세심하게 마련된 코스가 아닌 이와 같은 코스를 갈 때에는 지나치게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이번 여행에서 지도가 알려준 대로 갔다가 길이 막혀 몇 번을 돌아나와야 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원통에서 속초로 가려면 미시령을 넘어가야만 하죠. 길이 잘 닦였기 때문에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난이도가 있습니다. 게다가 저는 당일치기 여행을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귀경하는 막차가 끊기기 전에 속초 터미널에 도착해야만 했죠. 저는 8시 30분에 원통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로 출발하여 16시 20분에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거리나 시간 상으로 매우 괜찮았던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6시 30분에 동서울버스터미널에서 원통으로 가는 첫 차가 출발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첫 지하철을 탔습니다. 어제는 비가 많이 내렸는데 오늘은 기온이 다소 쌀쌀하지만 그래도 날씨가 맑아서인지,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젊은 커플들이 꽤나 보이는데, 제가 원통에서 하차할 때까지 상당수 남아 있었습니다. 아마 속초나 양양으로 향하는 친구들이겠지요. 본디 원통시외버스터미널에는 8시 10분에 도착해야했지만, 항상 그렇듯이 다소 지체되어 8시 반에서야 비로소 도보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네이버 맵에서 지시한 대로 군인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평화로운 거리를 지나 시골길로 진입합니다. 미시령을 가리키는 표지를 보면서 천천히 시골길을 걸어갑니다. 정말 조용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한국에 놀러온 외국인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그런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네이버 지도는 제 뒤통수를 칠 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지시한 대로 날듯이 걸어가다보니, 시골 소똥냄새를 진득하니 풍기는 밭이 떡 제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별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나가서 44번 국도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지요. 만약 누군가가 이 코스를 가신다면, 일단 시골길을 좀 걷다가 도중에 다리를 건너서 국도로 들어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약 1km 정도 걸어가는 이 첫 맛을 잊을 수가 없거든요. 여하튼 44번 국도로 합류해서 그 때부터는 왼편으로 쌩쌩 달려가는 자동차들과 함께 걷기 시작합니다. 물론 오른편에는 멋진 시골 풍경이 계속 이어지지요.
위의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자전거를 통해 이동하는 코스를 그대로 밟아나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도 갓길을 주로 해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국도 갓길을 걷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은 아마 이와 같은 여행을 자제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제 경우에는 옆에 덤프 트럭이 지나가도 전혀 쫄지 않는 성격이라 가능했지만 말이죠. 원통에서 속초까지 가는 국도는 갓길이 매무 넓게 형성되어 있어서, 맨 끝으로 붙어서 걸어다닐 경우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불 밖은 항상 위험합니다. 부언하자면, 자전거를 통해서 국도로 이동하는 경우가 훨씬 위험합니다. 용문-속초 라이딩하는 라이더들은 항상 자동차 운전자들에게 감사하셔야 합니다. 이들은 심지어 자전거전용도로조차도 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싸이클용 자전거인 로드바이크는 바퀴가 얇아서, 자전거 전용도로로 달리더라도 펑크의 위험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라이더들은 자동차 도로에서 떼를 지어 달립니다. 문제는 이렇게 달릴 경우, 자전거를 탄 이뿐만 아니라 자동차 운전자들에게도 위험하다는 점입니다. 도보여행자야 갓길에 딱 붙어서 이동하니, 자동차 운전자에게도 위협이 될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겠지요.
제법 걷다 보면, 44번 국도와 46번 국도가 갈라지는 지점이 위 지도와 같이 나옵니다. 이 때에 46번 국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도로표지판이 잘 되어 있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건널목이 다소 요망하게 꼬여 있기 때문에, 단거리 달리기를 해야만 합니다.
46번 국도로 넘어와 헐떡대는 숨을 고르고 나면, 이제 56번 국도로 다시 넘어갈 때까지는 계속 외길입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만 합니다. 원칙적으로는 46번 국도를 쭉 걸어가다가 아무 생각없이 56번 국도로 합류하면 됩니다.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문제는 바로 한계터널과 용대터널입니다.
네이버 지도를 보면, 한계터널과 용대터널을 우회해서 가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도 여행을 준비하기 전에 이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터널 안을 걸어서 갈 경우 나쁜 공기를 잔뜩 마시고 자동차의 굉음까지 계속 들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저렇게 둘러 가면 시간은 다소 더 걸리겠지만, 많은 라이더들이 용문-속초 구간에서 이 46번국도옛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칭송합니다. 반드시 걸어봐야죠. 그리고 저는 분명히 이 길이 나뉘는 지점을 봤습니다.
저렇게 '자전거도로(46호선옛길)'이라고 나와 있었지만, 제가 막상 저쪽으로 들어가서 보니 어찌나 산속으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46번 국도와 다시 합류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혹시 중간에 가다가 또 다른 옛길이 있겠거니, 하고 무작정 걸어갑니다. 그랬더니...
그렇습니다. 떡! 하니 한계터널이 나옵니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터널 진입을 합니다. 터널 오른쪽에 걷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따로 길이 마련되어 있기는 합니다. 물론 도보여행자가 아닌, 터널안전점검을 위한 길입니다. 그래서 위험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길이가 제법 길었습니다. 이럴 때에 절대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팀 그로버는 15년 동안 마이클 조던의 멘탈 코치를 했으며, 그 외에 코비 브라이언트나 버락 오바마 등의 유명 인물들과 훈련을 같이 했습니다. 그가 쓴 <멘탈리티>라는 책은 유익한 이야기가 가득합니다만, 그 가운데에서도 "문제(problem)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상황(situation)만이 존재한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가령 제가 타고 가던 비행기가 제트기류에 휘말려서 흔들리고 있다고 합시다. 이런 때에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습니다(We have a problem.)"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팀 그로버와 마이클 조던,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문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내가 처리해야 할 상황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상황에 대처하는 것을 즐깁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즐겁지요. problem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발생했어요!"라는 말은 그 문제가 우리에게 나쁘다는 의미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대처할 상황이 생겼네요."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겠지요. 왜냐하면 자연법칙에 따라 발생하는 모든 자연적 상황에는 "나쁨"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제 한계터널을 지나니, 곧바로 용대터널이 나옵니다. 터널 오른편에는 멋진 자연풍경이 펼쳐저 있습니다만, 저는 다시 터널로 들어갑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보며 여러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전진합니다. 용대 터널은 한계 터널보다 훨씬 짧아 통과하기가 용이합니다. 터널 두 개를 통과하고 나니, 다시 햇볕이 쨍쨍한 대자연입니다. 더욱 힘차게 걸어야죠.
흔히 도보여행은 룰루랄라 신나게 발걸음을 옮기며 계속해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오해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동일한 풍경이 끝없이 반복되며, 체력은 점점 고갈되고 어느샌가 다리는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때에 귀에 이어폰을 끼거나 하면 큰일납니다. 왜냐하면 도시에 있다가는 죽었다 깨어나도 얻기 힘든 절대 고독과 내면의 고요함이 절로 내게 찾아오거든요. 사실 이럴 때에 평소에 해결하지 못했던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머릿 속에서 해결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의 저는 이럴 때에는 심심하기도 하니까, 평소에 고민했던 철학적 문제들을 떠올려서 고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볼을 스쳐가는 강원도의 시원한 바람이 제 잡념까지 날려버리는 것을 마냥 즐깁니다. 제가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주변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제 몸상태를 끊임없이 체크하며 빠진 준비물은 없는지, 다음 여행때에는 무엇을 추가로 마련해야 할지도 생각해봅니다. 가령 저는 오늘 도보여행의 기본인 사탕과 초컬릿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소 도보여행 때에는 이른 새벽에 출발해서 아침 식사를 하지 않고 점심 때까지 걷습니다. 물조차도 마시지 않지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와 같은 방식이 가능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자, 급격하게 당이 떨어지면서 눈 앞이 노래졌습니다. 그래도 주변의 그저 그런 관광객용 식당에 들어가기가 싫어, 차라리 편의점이 나올 때까지 계속 걷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백담사 입구를 지나서 한참 걸어가도 제가 원하는 편의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강원도의 바람은 오늘따라 어찌나 센지요. 완전히 탈진하여 걷다 보니, 바람에 떠밀려서 도로로 나가기까지 했습니다. 바람을 버틸 힘조차 없던 것이었습니다. 사탕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정말로 후회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간신히 46번 국도에서 56번 국도로 다시 갈아탔습니다.
이 56번 국도는 속초시청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 국도만 따라서 계속 가면 속초시외버스터미널 근처까지 아무런 고민 없이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제 아무 식당이라도 가서 점심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솟아오릅니다. 오후 1시 가까이 되니, 정말 발 한 걸음도 더 뗄 힘이 없습니다.
이 때 저를 구해준 것이 바로 이 <선바위카페>입니다. 처음에는 '감자떡'을 먹으러 무작정 뛰어들었는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빵이라도 좀 팔겠거니 하고 들어갔더니, 즉석라면이 여럿 있었습니다. 과자도 있었고요. 친절하신 아주머니께서 즉석라면을 손수 마련해서 주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지쳐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먹은 후추라면은 사리곰탕면 맛이었는데 정말로 끝내줬습니다. 잔잔한 70~80년대 팝송이 흐르는 시골 카페의 주인장은 제게 김치와 물을 가져다 주신 뒤 다시 제 일을 하러 들어가십니다. 후추라면과 김치를 잔뜩 먹고 한숨 돌리니, 정신이 점점 돌아왔습니다. 다리에 힘도 올라왔고요. 여기에서 좀 더 음악을 들으며 즐기고 싶었지만, 도보여행자는 또 다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멋진 카페를 뒤로 하고 저는 다시 힘차게 걸어나갑니다. 이제는 몸을 통째로 날려버릴 것 같은 매서운 바람도 무섭지 않네요.
진부령로를 걷다가 미시령로로 들어선지 한참 됩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난관입니다.
미시령터널과 미시령옛길로 갈리는 이 지점에서 반드시 미시령옛길로 들어서야만 합니다. 미시령옛길로 걷다 보면 나중에 다시 56번 국도로 합류합니다. 하지만 미시령터널로 가면 또 그 지옥같은 터널 체험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서 자전거길이 잘 닦여 있는 미시령옛길로 들어섭니다.
정말 오늘 오기 잘했다는 탄성이 나올 만큼 멋진 풍경입니다. 다만 바람이 터무니없이 셉니다. 그래서 급기야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갈까 벗어서 가방 안에 넣습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셉니다. 게다가 미시령 정상까지는 제법 거리가 멉니다. 라면으로 채웠던 배가 슬슬 고파질 때쯤, 미시령에 도착했습니다. 미시령 즈음에서 우리는 고성군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원래 미시령에 들어서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포토존이 있는데, 저는 바람에 떠밀려서 곧바로 다운힐(아래로 내려감) 코스로 접어들었습니다. 기념사진 하나를 남기 못해서, 참으로 아쉽습니다.
신나게 걸어내려오다가 "여기서부터 고성군"이라는 글씨를 보자마자, "아뿔싸, 사진을 안 찍었네!"하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다시 걸어 올라갈 생각은 없었고, 수 km에 이르는 길을 걸어내려갑니다. 이제는 오직 내리막밖에 없습니다.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며 신나게 걸어내려갑니다.
멋진 사진을 여럿 찍었는데, 역시 가장 멋진 풍경은 제 마음 속에 있는 듯합니다. 미시령옛길은 자전거 전용도로이기 때문에, 자동차보다도 자전거가 우선입니다. 걸어내려가는 제 옆으로 쏜살같이 내려가는 자전거들이 여럿 보입니다만, 저는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걸어내려오는 편이 좋습니다. 걷다 보면 여러 스토리들을 만날 수 있거든요.
자, 아름다운 휴양도시 속초에 도착했습니다. 사진상으로는 갓길이 상당히 위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비가 꽤 됩니다. 속초에 들어왔다 뿐이지,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하지만 이제는 도시에 진입했다는 안도감에서인지 다리에 더욱 힘이 붙습니다. 시외버스터미널은 56번 국도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변 속초인들에게 물어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청 주변을 헤매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에, 일단 편의점에 들어가서 샌드위치 2개를 사서 씹으면서 걸어갔습니다. 제가 가는 방향으로 고속버스들이 끊임없이 보이는 것을 보니, 이제 거의 다 왔나 봅니다.
오후 4시 20분, 저는 속초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아까 미시령에서 걸어내려오면서단 한 장 남은 오후 5시 버스 티켓을 예약했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급했습니다만, 이제는 모든 것을 이룬 셈입니다. 끝없는 성취감이 밀려들어와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터미널 옆의 세븐일레븐에 가서 시간을 때우기로 합니다. 놀랍게도, 2층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샌드위치와 클라우드 캔맥주 하나를 사서 올라갑니다.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매우 조용했습니다. 거의 제가 독차지한 셈입니다.
맥주를 마시면 버스 안에서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을까 잠깐 생각도 했습니다만, 일단 질렀습니다.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오니 정말 살 것 같습니다. 4시 50분이 되어 편의점을 나서 승강장으로 갔습니다만, 4시 55분 버스를 타는 승객들로 인해 잠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배차 간격이 이렇게 짧다니요! 어찌나 젊고 패셔너블한 사람들이 많은지, 보기가 좋았습니다. 아울러 영락없는 등산객 꼴인 꾀죄죄한 제 모습이 다소 미안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운전석 바로 뒷편 오른줄 좌석에 무사히 탑승했습니다. 출발할 때에는 일반 버스를 탔는데 귀경할 때에는 우등 버스를 타게 되었군요. 가격은 같지만, 버스 기종은 다른...이것은 복불복입니다. 아무튼 정말로 편하게 앉아 갈 수 있었습니다. 본디 속초에서 동서울터미널까지는 2시간 10분 가량이 소요됩니다. 저녁 5시에 출발했으니, 원래는 7시 10분에 도착해야만 했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녁 9시에 도착했습니다. 이래서 또 하나 배웁니다. 아, 일요일보다는 토요일이 차라리 여행하기에 낫겠다. 저는 주로 토요일에 도보여행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2배 가까이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를 겪지 않았거든요. 제가 도보여행에 지쳐 곯아떨어지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지겨울 뻔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3시간을 내리 자고 나니, 나머지 1시간은 그다지 지겹지 않더군요.
총평입니다. 원통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시외버스터미널까지실제로는 47km 정도 걸으면 됩니다. 원통에서 시작할 때 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고, 갓길이 잘 갖춰져 있어서 도보여행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미시령까지 올라가는 데에도 생각만큼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올라가는 길이 길고, 내려오는 길은 더욱 깁니다. 이 점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제일 좋았던 풍경은 역시 미시령옛길을 하산하는 코스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라이더들이 "46번국도옛길"이 아름답다고 칭송했는바, 다음에는 이쪽으로도 한 번 가보고자 합니다. 끝으로 어째서 그렇게 힘들게 도보여행을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저로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중요했습니다. 첫째, 오랜만에 남다른 성취감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최근 생활이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경향이었고, 뭔가 색다른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몸을 힘들게 해서 성과를 얻는 것, 이 쪽이 성취감을 얻는데에는 매우 도움이 됩니다. 둘째, 다소 불어난 뱃살을 빼고 싶었습니다. 제 경험상, 가장 뱃살을 빼기 좋은 운동은 아침 공복에 수십 킬로미터를 걷는 것입니다. 정말 살을 빼고 싶으신 분들은 딱 일주일만 하루 20km씩 공복에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여성의 경우라도 시속 5km로 걷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껴서 일주일에 최소 3일은 하루 4시간 걸을 시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주중에는 퇴근 후, 그리고 주말에는 온종일 말입니다. 이어폰을 끼지 않는 편이 제일 좋습니다만, 걷기가 너무 지겹다면 오디오북을 4시간 동안 들어도 좋습니다. 저도 종종 그러니까요. 기타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것을 다 말하는 것도 민망하니 오늘은 여기에서 접는 편이 좋겠습니다. 여행은 가는 것 이상으로 계획을 짜는 것이 즐겁습니다. <만족>이라는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 번스는 인간에게 "만족"이라는 감정을 선사하는 호르몬인 "도파민"은 일을 성취해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퐁퐁 솟아오른다고 설명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정신 나간" 짓을 꾸미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자신만의 개성을 가장 드러내고 즐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음 번에는 오색 터미널에서 서핑의 성지인 죽도해변까지 걸어가는 여행을 꿈꾸며 오늘 글을 여기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