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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2 용문에서 홍천까지 걷기

<울트라마라톤맨>의 저자인 딘 카르나제스는 "웨스턴 스테이츠 100마일 달리기"를 통해서 진정한 울트라마라톤맨으로 거듭납니다. 100마일은 약 160km 정도 되지요. 이 거리를 24시간 내에 완주하면 허리춤에 찰 수 있는 은빛 메달을 받게 됩니다.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도전입니다만, 용문역에서 속초까지 아침에 출발해서 라이딩을 갔다가 식사를 뚝딱 마치고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복귀하는 여행이 최근 몇 년 동안 라이더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용문역에서부터 시작하면 대략 6~7시간 내에 완주한다고 합니다. 거리는 약 144km 정도 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fhFsy-yTED4

개인 사정상 당분간 자전거를 구매할 수 없는 저는 '그래? 그러면 걸어서 용문역에서부터 속초까지 가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트래블러스맵이라는 여행회사는 10일간의 일정으로 서울 영등포에서 강원도 속초까지 걸어가는 "걸어서 바다까지"라는 공정여행 프로젝트도 운영했더군요. 

http://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13391 

https://moneys.mt.co.kr/news/mwView.php?no=2019041817078026789

참으로 훌륭한 기획인데, 다만 9박 10일이라는 기간이 제게는 맘에 걸렸습니다. 게다가 저는 라이더들이 즐기는 코스를 그대로 따라서 가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카카오맵에서 거리를 검색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뜹니다. 

여기서 표시되는 시간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개인차가 있으니까요. 거리만 보면 됩니다. 저는 날씨가 선선한 가을에 기를 쓰고 하면 2일이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첫날에 80km, 둘째 날에 63km를 걸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2박 3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2일 안에 마쳐도 너무 늦은 시간이라 속초에서 1박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바에야 2박 3일로 시간을 넉넉히 배분하고 3일 차 저녁에 서울로 복귀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와 같은 시간 계산은 울트라마라톤을 뛰시는 철인들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딘 카르나제스는 엄청나게 험한 산과 강을 여러 번 거치면서 160km를 24시간 내에 주파하는 사람입니다. 그에 비하면 용문-속초 코스는 상당히 평이한 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44번 국도를 쭉 따라서 가다가 표지판만 잘 읽고 가면 되거든요. 라이더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미시령의 경우에도 업힐 직전 고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정상까지 실제 업힐 구간이 엄청나게 높거나 길지는 않(다고 합니다). 아마 뛰어난 울트라마라톤 선수라면 24시간 내에 주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 일단 2박 3일을 생각했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여행 계획을 짜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카카오맵으로 구간을 자세히 검토해서 2박 3일 일정을 만들어보았습니다. 목요일에 출발해서 토요일 저녁에 귀경하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폭염주의보가 발동했고 해당 구간 도보여행을 자세히 다룬 선행자료가 전혀 없어서, 오늘은 일단 맛만 보기로 했습니다. 용문역에서 내려서 신남시외버스터미널까지가 약 76km이니, 해당 구간이 하루 동안 걷기에 문제는 없는지 체크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남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어차피 하루 잠을 자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얼떨결에 토요일에 속초까지 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신남시외버스터미널 근처 숙소까지 다 파악해두었지요. 물론 제목에서 짐작해 볼 수 있듯이 저는 결국 홍천에서 발걸음을 멈췄지만 말이지요. 

 


이래서 2021년 7월 22일 목요일 아침, 저는 마들역에서 5시 35분에 출발하는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용문역으로 향했습니다. 기본 복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람막이 점퍼에 운동 반바지, 신발은 아식스 젤벤처7에 양말은 키모니였습니다. 인간의 뒤꿈치는 걷기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는 달릴 때에는 발바닥의 앞부분부터 디디지만(여기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만, 맨발로 달릴 경우에 자연스럽게 발바닥의 앞쪽부터 디딘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걸을 때에는 뒤꿈치부터 디딥니다. 이 때문에 몇십 km에 달하는 장거리를 걷게 될 경우에는 뒤꿈치 부분에 젤이 있는 쿠션화를 신는 편이 좋습니다. 아울러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도록 바닥이 단단한 양말을 신어야만 합니다. 평소 출근할 때 신던 양말을 착용했다가는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납니다."  대부분 국도를 따라 걷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음식물 보급이 여의치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500ml 물병 2개와 새콤달콤 캔디를 몇 개 챙겼습니다. 반창고와 접착 붕대를 챙기고 양말을 신기 전에 발가락 사이사이와 발바닥에 바셀린을 발라줍니다. 스마트폰 충전기와 보조배터리를 가방에 넣고 양말도 한 켤레 더 넣습니다. 충분한 현금과 카드를 챙기고 사파리 정글모와 마스크를 착용하면 대충 준비는 끝납니다. 여분의 속옷? 그런 거 없습니다. 1박 2일 여행이기 때문에 그냥 출발합니다. 숙소에서 빨래하면 밤새 마를 것입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콘셉트 샷을 찍은 뒤 냉큼 지하철에 올라탑니다. 상봉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갈아탔는데 대기 시간이 2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출발부터 상쾌합니다. 어제 새벽 10km 슬로 조깅을 하다 기분이 좋아 막판 스퍼트를 했더니 허리와 종아리가 약간 뭉쳤습니다. 슬로 조깅을 입에 달고 살아도, 항상 이렇게 실수합니다. 지평역이 아닌 용문역을 종점으로 하는 열차인지라, 졸아도 상관없습니다. 1시간가량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니, 양평역에서 대부분 하차합니다. 갑자기 객차 안이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만 평소에 한 번 해 보고 싶었는데 차마 못 했던 그 일을 잠시 저질러봅니다. 바로 신발을 벗고 지하철 의자 위에 누워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한 번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금세 자세를 고쳐 바로 앉았습니다. 역시 소심해서인지 길게 할 수 없었습니다. 


용문역에 내려서 화장실까지 다녀오니 마음이 매우 가뿐합니다. 이제 큰 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찾을 일은 없을 듯합니다. 카카오맵에 따라 슬금슬금 이동합니다.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손에 듭니다. 당장 먹을 것은 아니지만, 국도를 걷다 배가 고플 때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개인적으로 용문역에서 출발해서 44번 국도를 따라 걷는 경험은 그야말로 멋졌습니다. 푸른 논과 밭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군데군데 푸근한 풍경의 집들과 가내공장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적어도 오전까지는 그다지 덥지 않고,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산으로부터 계속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오전까지는 그다지 더위를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0시까지는 바람막이 점퍼를 벗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고속도로는 도보 진입이 불가능하지만, 국도에는 인도가 항상 표시되어 있습니다. 물론 곁으로 쌩쌩 지나가는 덤프트럭이 일으키는 바람에 몸이 흔들릴 때에는 그렇게 안전하다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보다 도보 여행이 더 위험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도 옆의 인도는 본디 자전거가 아닌 사람이 걷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좁고 울퉁불퉁하며 자갈이나 모래가 많습니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이동하는 라이더들은 대부분 바퀴가 얇은 "트랙용" 로드 바이크를 타는데, 인도로 갈 경우 펑크 나기 딱 좋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로드 바이크들이 자동차 도로를 침범하여 이동하는 광경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도 인도로 간다기보다는 대부분 흰 선을 물고 갑니다. 자동차 운전자의 입장에서 결코 곱게 볼 수 없는 장면이지요. 하지만 도보여행자는 인도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뭐, 자전거 여행자를 비난하기 위해 쓴 글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모두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방안이 구상되고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 사진의 경우, 왼쪽에 보행용 도로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오전 9시 12분, 슬슬 배가 고파와서 버스 정류장 안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뭅니다. 7시부터 걸었으니까 2시간 가까지 쉬지 않고 걸은 셈이네요. <걷는 사람 하정우>라는 베스트셀러에서 하루 1만 보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배우 하정우는 50분 걷기+10분 쉬기 규칙을 지킨다고 합니다. 비록 잘 지키지 못하지만, 저는 이 원칙에 매우 공감합니다. 물론 소위 "삘 받으면" 몇 시간씩 걸어도 지치지 않습니다. 특히 도보여행 초반에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쉬면서 다리를 풀어주지 않으면, 그런 방식으로 하루 온종일 걷기란 어렵습니다. 초반에 "오버 페이스" 하다가 나중에 죽도 밥도 안 되는 결과로 이어지지요. 하정우 씨는 오랜 경험을 통해 이 점을 체득했음에 틀림없습니다. 4시간만 걷고 끝낼 정도의 거리라면 상관없지만, 온종일 걷고자 한다면 50분 걷기+10분 쉬기 이 방식 좋습니다. 이 버스 정류장과 주변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물론 오늘 오전의 일이었습니다. ㅎㅎㅎ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걷는데? 특별히 볼 문화유산이나 맛집 멋집도 없고 똑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지는 긴 거리를 왜 땡볕 아래에서 걸어가는 거야? 그리고 왜 속초까지 걸어 기고 싶은데? 도대체 왜?" 이와 같은 질문은 아마 남들이 잘 안 하는 "울트라마라톤"이나 "오지 트래킹" 등을 하는 이들이 귀가 따갑게 듣는 질문일 것입니다. 몇십 년 전에는 마라톤을 하는 이들도 동일한 질문을 받았지만, 이제는 마라톤을 한다고 해서 저와 같은 질문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지요. 세상이 변하면 질문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해서 저는 "용문에서 속초까지 걸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은 기질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이는 음악에, 어떤 이는 음식에, 어떤 이는 운동에 미칩니다. 하지만 하루 24시간을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는 드물 것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사정은 누구나 같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심장이 터질 듯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일을 찾아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매우" 다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전거 라이더들이 가는 코스를 그대로 따라 속초까지 걸어가 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계획을 짜는 사람이 제가 최초는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냥 남들이 바보같이 여기는 아이디어들이 제 심장을 뛰게 만들어서입니다. 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다년간 가르쳤지만, 제 자신도 자신의 기질과 취향을 믿지 못해 낭비한 세월이 그간 얼마였는지요. 하지만 자신을 믿지 못하고 세상에 맞춰한 일들은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았고, 저는 그렇게 평범해져 버렸습니다. 이제 뜬금없이 40대 중반에 소심한 "자기 찾기" 캠페인을 다시 벌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재미있습니다. 비록 완전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더 해 나가고자 합니다. 


꾸준히 걷다 보니 어느새 경기도 양평을 지나 강원도 홍천에 진입했습니다. 

자동차 전용도로 옆 인도가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천에 입성하여 조금 걷자마자 머리 위로 "폭염으로 인해 실외 활동을 삼가라는" 전광판이 번쩍입니다. 이때까지는 음식과 음료가 넉넉해서 피곤한 줄을 몰랐습니다. 도보여행 초반이기도 했고요. 여태까지는 멋진 농촌 풍경이 이어졌는데, 이제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아는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횡단보도와 건널목이 대표젹인 사례이지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경험을 담은 책들을 보면, 사람과의 만남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용문역에서 홍천까지 오는 과정에서 국도 옆을 걷다 보니, 사람 구경을 거의 못해보았습니다.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때문에 도보 여행 때 이어폰을 절대 챙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어폰을 챙기는 순간,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홀로 뚜벅뚜벅 걷다 보면 온갖 상념들이 솟아오릅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주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때야말로 이리저리 엉켰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타인에게 감사하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도보여행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체력이 주어진 데에 대해 고마워하는 시간이 되어야만 합니다. 비정규직 시간강사 신분으로 비록 많은 수입을 얻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방학 기간 동안에 이렇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데 대해서 마냥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저라면 방학 때야말로 학기 중에 마무리하지 못했던 논문들을 잔뜩 "싸질러서" 전임교수 임용을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저는 저입니다. 전임을 목표로 하는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저는 그렇게 살 기질을 타고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배우고 살아내는 철학은 결코 아무도 읽어보지 않고 철저히 무의미한 논문을 다량 쏟아내서 대학에 자리를 잡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제 삶은 앞으로도 평탄치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이동식 주택, 농막"을 제작하는 회사가 제법 제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농막은 본디 거주용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농사를 짓다가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농막을 지어놓고 그곳에 상주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고 지방 공무원들이 농막을 철저하게 단속할 유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라도 해서 사람들이 농촌에 많이 와주고 돈을 써주고 살아주기를 "은근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2천만 원 내외의 이동식 주택을 농막용으로 짓고 살아보겠다는 꿈을 꾼 적도 있습니다. 물론 불법이라는 현실을 자각하고 재빨리 포기했지만 말이죠.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터무니없이 오른 부동산 가격으로 인해, 느리게나마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법 개정을 통해 지방에서 저렴한 가격의 이동식 주택을 짓고 살 수 있다는 법적 보장이 이루어진다면, 오늘날 기성세대의 라이프스타일에 염증을 느끼는 20대를 중심으로 해서 지방으로의 이동이 본격적으로 현실화될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부동산 문제입니다. 지금처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방자치 활성화 정책은 영원히 긍정적인 해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젊은 사람들이 내려가서 살아야만 합니다. 몇 주 전에 방문한 강원도 양양 인구해변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서 세워놓은 피자가게와 칵테일 바 골목 바로 뒤로는 70대의 노인들이 사는 집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그 노인분들과 이야기한 바로는 그분들은 그와 같은 변화를 환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물론 불편한 점들이 없지 않겠지요.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아무도 찾지 않던 시골 해변이 무려 버스를 대절해서 와야 될 정도로 활성화된다면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결국 모든 변화는 젊은이들이 일으킵니다. 586 세대들은 더 이상 본인들이 젊다는 환상을 내려놓고(실제로도 젊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 세대인 20대와 30대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입장으로 물러서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그들이 주도하는 세상은 이미 시대에 한참 뒤떨어져 있습니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며느리고개 터널에 이를 즈음, 아스팔트 도로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제 체력 또한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터널을 통과할 때 차량들이 지나갈 때마다 마녀들이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이어집니다. 더욱 지칩니다.

 터널을 빠져나와 홍천 시내로 접근하지만 제가 그토록 바라는 편의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왜 편의점을 찾을까요? 운동과 식단의 관계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경험적으로 아시겠지만, 맵고 짠 음식이나 국물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운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전자의 경우 수분 섭취를 계속 요구하게 되며, 후자의 경우에는 위장이 꿀렁거려서 도저히 운동할 수 없습니다. 새벽 달리기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전날 저녁에 마라탕이나 기타 맵고 짠 음식을 먹었을 때 아침부터 괜히 운동하기 싫어진다는 점을 눈치채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원래 맵고 짠 음식을 먹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달콤한" 과일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인류의 바람직한 기호품입니다. 따라서 달달한 입맛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천연의 달콤한 대신 정제 탄수화물의 가짜 달콤함을 찾는 것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반면에 맵고 짠 음식은(대부분의 한국 음식이 그러한데) 확실히 체력과 운동 능력을 저하시키며, 운동을 하기 "싫게" 만듭니다. 국물 음식의 경우는 자세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짬뽕 한 그릇 거하게 드신 뒤에 곧바로 달려 보십시오. 당장 배를 움켜쥐고 쓰러질 것입니다. 그런데 장거리를 달리는 자전거 라이더들의 경우, 대부분 식량을 보충한다면서 맵고 짠 음식 또는 국물 음식을 원샷합니다. 짬뽕이 대표적인 케이스지요. 그렇게 먹은 뒤 장거리 라이딩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술까지 마시게 되면 정말로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되지요. 저는 술과 짬뽕과 맵고 짠 음식을 미친 듯이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랑합니다. 저는 뭐든지 극단적인 케이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먹고 마신 뒤에 결과를 내야 하는 "신체적 퍼포먼스"를 행했을 때 반드시 나쁜 결과가 나왔으며, 이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해서 장시간 도보여행 때에는 저와 같은 음식을 삼갑니다. 그러면 어떤 음식이 좋단 말입니까. 저는 맹물에 샌드위치가 가장 좋았습니다. 특히 샌드위치를 고를 때에는 칼로리가 높은 쪽을 고릅니다. 왜냐하면 국도를 도보 여행할 때에는 언제 식사가 가능한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꺼번에 많이 먹기보다는, 조금씩 자주 먹는 편이 좋습니다. 이는 물을 마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켜기보다는, 입을 헹궈가면서 천천히 조금씩 마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저는 홍천에 진입하면서 "공사 중" 도로를 만나면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사 중"이야말로 여행을 하는 이가 원치 않게 만나는 변수입니다. 제가 목표로 했던 편의점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고, 게다가 지카카오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여러 변수들로 인해 저는 점심 식사 시간을 1시간 반 가까이 놓쳤습니다. 35도가 넘는 땡볕 더위에서 그와 같은 상황은 저를 방전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결국 저는 신남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계획을 포기하고, 홍천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귀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홍천에서 제 마음에 드는 편의점을 찾느라 이리저리 헤매는 바람에 점심 식사를 오후 1시 넘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1+1 행사 중인 펩시 콜라 600ml와 샌드위치, 그리고 500ml 물병을 깔아놓고 그늘이 진 편의점 테라스에 자리 잡았습니다. 샌드위치 하나를 먹으면서 콜라 1.2리터를 쉬지도 않고 흡입했습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무례하게(?) 다리를 걸치고 샌드위치와 음료를 천천히 마시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스트라바 앱을 보니 40km가량 걷고 쉬고 했습니다. 마라톤 주자들이 한 번에 뛰는 거리도 채우지 못하고 이렇게 편의점에 앉아 있으니 처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샌드위치와 콜라를 흡입하고 나니 몸 컨디션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몸이 살아났으니, 내친김에 신남 터미널까지 여정을 계속해볼까?" 혼잣말을 해봅니다. 하지만 제 몸은 이미 "이봐, 이만하면 충분해. 가다가 열사병 걸려서 쓰러질 일 있어? 게다가 신남 터미널까지 가는 코스에는 홍천과 같은 제대로 된 도심도 없다고. 그냥 풀밭뿐이야. 어디서 음식물 보급을 하려고 그래?"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저는 오늘 "용문-속초" 탐사를 여기서 마치고 귀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카카오맵을 검색해보니, 홍천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2.4km를 더 가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지만, 이제 제 목표를 팽개치고 귀경하려 하니 그 거리조차 귀찮았습니다.  


2.4km를 걸어가며 몇 번씩이나 다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포기하면 반드시 후회할 거야. 너는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아직 시험해보지 않았잖아. 네 가능성을 시험해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 아니었어? 신남까지 걸어가. 인제까지 걸어갈 수도 있어. 여기서 포기하지 마." 그러나 저는 결국 터벅터벅 걸어서 홍천 터미널까지 왔습니다. 건물 외면에 "터미널"이라고 적혀 있지 않아서 다소 의아했습니다. 3시에 출발하는 무정차 우등버스를 2시 34분에 예매하고 대기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생각보다 평일에 홍천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고객들이 많았습니다. 2시 55분에 버스를 타고 스마트폰 충전을 시작한 뒤 의자에 기대어 앉았습니다. 비록 몸은 편했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내,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개운하지가 못합니다. 비록 집에서 편하게 삼성 갤럭시 노트북을 사용하여 여행기를 작성하고는 있지만, 지금 이 시간에 신남 시외버스 터미널 어느 허름한 모텔에 홀로 누워 있어야 하는 편이 낫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는 스스로 만든 미션에 뛰어들었고, 스스로 실패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지도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살 길만을 찾았던 듯합니다. 제 한계를 실험해보았다면 여행 후에 훨씬 더 큰 사람이 되었을 터인데. 끝내 미련이 남습니다. "용문-속초 도보여행"을 한여름에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당분간 제가 도전할 여유가 있지는 않을 듯한데, 저만큼이나 괴짜인 누군가가 대신 도전해서 성공하여, 그를 바라보는 제게 큰 기쁨과 동기부여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산의 멋진 수제 맥주 브루어리인 <플레이그라운드>에서 사 온 IPA 맥주를 마시면서 쓴 글입니다. 오늘이 더위 중의 끝판왕인 "대서"인데, 모든 분들 건강 조심하고 열대야로 인해 고통을 겪지 않는 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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