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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725 뚝섬유원지에서 홍대입구까지 걷기

아침에 눈을 뜨니 7시입니다. 피곤해서인지 늦잠을 잤습니다. 오늘은 그냥 집이나 근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보내려 했으나, 역시 일요일 아침에는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아침부터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 심상치 않습니다. 시외로 나가는 것보다는 서울 내에서 간단히 걷는 편이 나은 듯합니다. 일단 복장을 갖추고 지하철을 탄 뒤에 생각하기로 합니다. 마들역으로 걸어가는 길. 어제 주문한 애프터샥 골전도 이어폰이 빨리 배송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입니다. 더운 날씨에 이어폰을 끼고 조깅을 하다 보니 그만 염증이 생겨서 치료 중입니다. 골전도 이어폰은 귓구멍에 직접 삽입하는 형식이 아니라, 라이딩이나 러닝을 하는 분들에게 매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골전도 이어폰까지 왔네요. 망설이지 말고 진작 주문할 걸 그랬습니다. 7호선 지하철을 타고 내려가다가 상봉역에서 내리면 이제 경기도나 강원도로 나가는 것이고, 뚝섬유원지역까지 간다면 홍대나 여의도까지 걸어갈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잠겨 있다가 그만 상봉역을 지나쳤습니다. 오늘은 서울 시내를 돌라는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내리니 8시 반입니다. 결정했습니다. 오늘은 홍대 입구역에 있는 존앤슨피자펍(JOHN & SON PIZZA PUB)에서 점심으로 피맥을 하기로 합니다. 결정이 났으면 이제 걷는 것 이외에는 다른 옵션이 없습니다. 

평소에는 5시 35분 첫 열차를 타고 6시쯤 출발해서 햇볕에 당할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땡볕을 즐기는 저로서도 슬며시 겁이 납니다. 청담 대교 아래를 지나쳐서 강변북로를 따라 영동대교를 거쳐 성수대교까지 이릅니다. 

"성수"는 말 그대로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이지요. 우리의 친절한 네이버 설명을 보니 "성수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조선 시대 임금이 말을 기르는 것과 군대의 훈련을 지켜보던 정자인 성덕정()과 이곳에 위치한 뚝섬 수원지()에서 한 글자씩 가져와서 생긴 이름이다. 이곳이 한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라고 하네요. 하지만 제게는 아직까지도 1994년의 안타까운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강변북로를 따라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아래 그림과 같이 뚝섬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때 다리를 건너 주지 않으면, 중랑천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카카오맵이 알려주는 바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이쁘게 다리를 건넜습니다. 

자, 용비교 아래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는 라이더들을 뒤로하고 다시 줄기차게 걷습니다. 저는 사파리 모자를 쓰고 바람막이 점퍼까지 입은 상태인데, 190CM가 넘는 서양인이 싱글렙과 3인치 팬츠를 입고 슬로 조깅으로 제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워낙 다리가 기니 보폭도 넓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쭉쭉 나가는 것이 매우 보기 좋습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에 홍천까지 걸어가는 과정에서 나시를 입고 도보여행을 했다가 그만 양쪽 팔에 가벼운 화상을 입었습니다. 물집이 잡히거나 살갗이 벗겨지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옆으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점퍼만으로는 부족하고 암슬리브를 사야겠습니다. 

한남대교를 거쳐서 반포대교에 도달했습니다. 여기에서 다리를 건너면 여의도로 가고 직진하면 홍대로 갈 수 있습니다. 지난 도보여행 때는 여의도에 있는 여동생 집에 찾아가서 점심을 먹었으나, 오늘은 저만의 피맥 파티에 만족하기로 합니다. 직진 결정!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면서 걷기도 할 법한데, 오늘은 찌는 듯한 더위 탓인지 그냥 앞만 보고 가게 됩니다. 바람막이 점퍼를 벗고 싶지만, 팔을 더 태웠다가는 낭패를 볼 것 같아 그냥 사우나에 갇힌 사람처럼 헉헉대며 걸어갑니다. 이촌 나들목까지 왔으면 이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으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 멀리 63 빌딩이 보이니 이제 다 왔다는 착각마저 듭니다. 사실 거리가 꽤 남았습니다. 

이 시간 대에는 아무래도 러너보다는 라이더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라이더들은 그래도 살갗이 타지 않게 단단히 무장을 한 상태이고, 속력을 내어 달리다 보면 제법 바람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폭염에 기꺼이 라이딩을 감행하는 라이더들은 모두 "역마살"이 잔뜩 낀 노마드(유랑민)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고요.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트북 하나로 생계를 유지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발목이 묶였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분위기로는 올해 안에 코로나 사태가 종식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저는 이로 인해 국내에서 걷기, 달리기, 자전거 타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점에 주목합니다.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까닭에 국내여행으로 눈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은 뜻밖에도 대한민국의 길(road)이 해외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녔다는 점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특정 장소가 아닌 "길"을 강조합니다. 철저히 제 개인적인 취향에 입각해서 말씀드린다면, 저는 아직도 국내의 유명 관광 명소들을 그다지 즐기지 않습니다. 제주도에 가도 200km가 넘는 제주도의 바닷길과 그 주변 풍경을 즐기고, 그 주변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개인 카페들을 사랑합니다. 대한민국을 거미줄처럼 얽어매어 퍼진 자전거길과 그 주변 풍경, 그리고 그 여행 가운데 나타나는 이름 없는 카페와 시장들, 시골 풍경들을 사랑합니다. 아, 몇 주 전에 방문한 양양의 인구해변과 죽도해변이 최근에는 제 사랑이 되었습니다. 물론 며칠 전에 노마스크 풀 파티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는 했습니다만, 인도해변과 죽도해변은 지방이 자연스럽게 활성화되는 멋진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cPzIioZqVE


자, 마포종점 나들목이 나왔으니, 이제 공덕역 쪽으로 이동할 차례입니다. 한강을 떠나서 도심으로 진입합니다. 세븐일레븐에 들어가서 500ml 물병 2개를 구입하고 공덕오거리까지 걸어갑니다. 평소에 가던 길로 계속 갔으면 참 좋았을 뻔했지만, 무엇에 씌었는지 처음 가는 길로 무작정 걸어내려 갑니다. 

계속 걸어내려가다 보니 마포구를 떠나서 용산구에 들어서게 됩니다. 별생각 없이 계속 걷다 보니 6호선 효창운동장역까지 내려갔습니다. 여기에서 경의선 숲길을 제대로 찾아들어가면 문제가 없는데, 초행이다 보니 헤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위가 너무 심해서 그냥 왔던 길을 되돌아가 평소 가던 길을 따르기로 합니다. 마포구에 다시 들어와서 되돌아가다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이제 저에게 친숙한 경의선 숲길에 들어서니, 홍대입구에 다 온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거리가 얼마 되지 않지요. 제가 양손에 물병을 들고 씩씩하게 걸어가는데, 제 곁으로 슬로 조깅을 하는 젊은 여성 한 분이 지나갑니다. 20대 초반이며 날씬한 몸에 나이키 셔츠와 레깅스, 신발을 갖춰 신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더워서인지 조금 뛰다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결국 제가 훨씬 앞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걷다 보니 경의선 책거리에서 자주 마주쳤던 소년과 소녀 상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들이 폭염에 고통받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특히 엎드려 있는 소년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더운데 구태여 저 높은 곳에 올라앉아 책을 읽고 있는 소녀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저들도 <토이 스토리>의 캐릭터처럼 한밤중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도저히 못해 먹겠다"라고 불평하는 것은 아닐까요?


경의선 책거리도 끝나고 이제는 제가 사랑하는 피자 가게로 칙칙폭폭 걸어갈 일만 남았습니다. 걷는 도중에 드론 판매 가게 앞에서 사진을 찍어 봅니다. 사파리 모자를 눌러쓴 제가 꼭 다스 베이더 같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john & son pizza pub>. 이태원 길거리 피자 같은 분위기이고 맛도 제법 좋습니다. 뛰어난 가성비는 덤이지요. 그런데 제가 올 때마다 연세가 제법 있으신 여성 두 분만 자리를 지키십니다. 존은 어디 가고 선은 어디 갔을까요...

페페로니 피자 한 조각(4000원)과 클라우드 맥주 한 잔 (2500원)을 시키고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테이블 아래 다리를 쫙 뻗고 기대어 앉습니다. 센스 있게 맥주를 먼저 가져다주십니다. 한 잔 들이켜니,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습니다. 차가운 맥주가 타고 내려 가면서, 제 몸 안의 내장 위치가 다 파악되는 듯합니다. 이윽고 페페로니 피자가 나왔습니다. 사진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크기가 제법 됩니다. 여기에 파마산 치즈를 산처럼 뿌려 먹으면 피맥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먹었습니다. 

가게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30분 이상 머물러 있던 가게에 손님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곳이 이태원과 홍대의 젊고 자유로운 옛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아서 참 좋아합니다. 아무쪼록 이 가게가 오래오래 잘 운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피자 한 조각과 맥주 한 잔만 먹고 주인에게 인사한 뒤에 가게를 나섭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른 가게에 또 찾아가서 맥주를 더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땡볕에 시달리다 맥주를 마셔서인지, 기껏해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벌써 취해서 어질어질합니다. 에라, 그냥 오늘은 더 달리지 말고 귀가하기로 합니다. 이까지 왔는데 연남동까지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꽉 눌러둡니다. 무리해서 좋을 일은 없으니까요. 이렇게 저는 아침 공복 상태에서 부지런히 걸어 다니다가 피맥으로 점심식사를 마무리하고 지하철 2호선에 올랐습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지하철 객차 안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저를 반겨줍니다. 그리고 저는 등산을 마친 아재들이 흔히 그러듯이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역시 나이는 이길 수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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