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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르바 Aug 28. 2022

육아휴직 - 같이라서 행복했던 시간

로또에 당첨되면 늘 이렇게 살고 싶다

 신랑이 00 광역시로 취직을 해서 떠나고, 주말부부가 된 이후 생각보다 빠르게 그 생활은 일상이 되었다. 신랑은 그 학교가 너무 좋다며 일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했고, 나는 셋째를 낳으면서 출산휴가에 이어 첫 육아휴직을 6개월간 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신랑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으니 내가 일을 해야 했지만, 이제 신랑이 돈을 벌게 되고 셋째가 마지막 아이이니 이번에는 육아휴직을 해서 몸조리도 편히 하고 싶었고, 신랑도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가끔 혼자서 구렁텅이에 빠질 때만 아니면 대부분의 일상은 평범했고 행복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고, 시댁에서는 내가 쉴 수 있게 가끔 애들을 돌보아 주셨다. 나만 내려놓으면 되었다.


 신랑이 취직을 하고 3개월 간은 그동안에 새로운 살림에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월급을 집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다음부터 얼마씩  거야?” 신랑은 급여에서 보험이나 월세, 톨게이트 비용, 주유비, 자기 생활에 필요한 금액을 빼고 계산을 하더니 100 원을 주겠다고 했다.  셋을 혼자 키우는 것을 감내하면서 신랑이 벌어다 주는 돈이 100 원이라는 것은 나의 구렁텅이에 먹이를 하나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내가 택한 사람이잖아. 신랑도 어찌할  없잖아. 최대한 아껴서 자기 용돈도 줄여가며 주는 돈인데. 급여가 오르면 나아지겠지.

 

 사실 나의 벌이만으로도 살아갈만했다. 우리는 소도시에 살고 있으니, 대출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나의 급여 300만 원 정도로도 낭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저축을 못할 뿐이다. 사실 더 아끼면 저축까지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포기해야 할 작은 행복들이 아쉬우니까.


 내가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이어서 육아휴직에 들어갈 시기를 며칠 앞두고 있을 때, 신랑은 새 학교에 근무한 지 6개월 만에 미안하지만 자기가 육아휴직을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새로운 학교의 직원들이 텃세가 너무 세서 상사가 교장에게 자기를 흉보고 다니고, 밉보여서 업무를 터무니없이 많이 주는데 이제 들어간 신입 내기가 뭐라고 항의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셋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기에게도 육아휴직이라는 최후의 무기가 있으니 써보고 싶다고 했다. “나쁜 놈들이네. 어쩔 수 없지. 그래. 내가 일하면 되지. 괜찮아.” 나는 아직 육아휴직에 들어가지 않은 시기라서 급히 교육청에 전화를 해보았는데, 2월 말이라서 이미 인사 업무가 끝이 났으니 육아휴직을 철회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는 6개월간 같이 놀았다. 신랑은 나보다 조금 더 길게 10개월을 놀았다.


 그 시기는 우리가 결혼을 한 후 처음으로 아이들을 같이 돌본 시간이었다. 신랑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고, 이어서 훌쩍 먼 도시로 직장을 잡아 떠나느라고 지난 3년 동안 하지 못했던 가족끼리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늘 혼자서 버겁게 육아를 하다가, 이젠 둘이서 세 아이를 같이 돌보고, 돈이 많이 들지 않는 곳으로 근처에 나들이도 많이 갔다. 아이가 셋이다보니 우리 부부 중 한 명은 첫째와 둘째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가거나 나들이를 가고, 나머지 한 명은 갓난아이를 돌보아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면 집에 남은 사람을 보고 “쉬고 있어.”하고 나갔다. 우리에게 아이를 하나만 돌본다는 것은 쉬는 것과 같았다. 에너지 많은 세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둘이 함께 하기에 평범하고 여유로운 시간들이었다. 비록 둘 다 육아휴직을 해서 통장에는 매달 육아휴직급여로 첫 3달은 120만 원가량, 나머지 석 달은 50만 원도 안 되는 돈이 들어왔기에 약간 대출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잘도 놀았다. 유치원에 큰 아이와 둘째 아이를 보내고, 막내를 시댁에 맡기면 오전에 두 시간 정도 같이 테니스를 배우러 가기도 했고 끝나고 나면 연애때 그랬던 것처럼 맛집을 찾아가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놀이터에서 실컷 놀아주다가 저녁 식사 후 자전거를 타고 천변으로 운동삼아 나들이를 갔다. 부모가 모두 집에 있으니 아이들은 저절로 잘 놀았다. 돌이 안 된 셋째 아이는 생김새도 귀엽고 온순해서 거저 키우는 것 같았다. 우리는 로또라도 되어서 직장에 다니지 않고 평생 이렇게만 살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 걱정만 아니면 참 행복했다. 그래서 일부러 금전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돈은 나중에 벌면 되지. 공무원 월급은 어차피 버티면 늘어나는 거니까. 나중에 돈이 있어도 아이가 다 커버리고 난 후면 소용이 없잖아.’ 했다.


 내가 2학기에 복직을 하고 난 후에도 신랑은 몇 달을 더 쉬었다. 아마 그때 신랑은 육아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졌던 것 같다. 오전에는 큰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막내는 시댁에 맡기고 테니스를 치고 왔고, 점심 식사는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함께 먹으면서 반주를 했고, 오후가 되면 내가 퇴근해서 돌아와 같이 육아를 했으니 그에겐 힘들 것이 별로 없는 육아였을 것이다. 나도 마음 놓고 직장에 출근할 수 있었고, 집에서 아이를 전적으로 봐주는 신랑이 있으니 든든했다. 그 시기에는 구렁텅이에 빠지는 일도 없어서 싸울 일도 없었다.


 신랑의 육아에 대한 그 좋은 기억이 나중에 피바람을 일으키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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