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할머니와의 마지막 저녁
회사가 끝나면 지친 몸을 이끌고 전철에 오른다. 남편이 야근때문에 늦는다는 연락을 받으면 드는 생각. 할머니랑 저녁먹어야겠다. 잠깐 지하철을 갈아타는 짬을 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할머니는 잘 안들리시기 때문에 지하철을 갈아타서 전화를 걸었다간 고성 통화로 민원이 접수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에서 신속하게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는 소식을 알린다.
"오늘 집에서 밥 먹어요", "어, 알았어" 뚝.
대답도 하기전에 끊어버리는 할머니. 끊긴 핸드폰을 뒷 주머니에 쑤셔넣고 슬며시 눈을 감으면 보지 않아도 할머니의 분주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할머니는 내가 오는날이 유일하게 시간이 빠르게 간다고 했다. 오랜만에 (그래봤자 일주일이지만) 평소에 하지 않는 반찬을 내놓으려고 고민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길 내내 할머니의 오늘 밥상엔 뭐가 나올까 떠올려 보는 시간이 나에겐 행복이다. 역에서 부터 집으로 가는 길에 단풍이 들고,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분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벚꽃이 지고 진달래가 활짝 폈다. 그 길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책을 읽으며 걸어가는 퇴근길을 상상하며 회사에서 그리 분주히 움직였지. 이정도 보상이라면 내일도 열심히 일할 맛이 난다.
새로 이사간 집은 당연히 좋지만 내가 정착할 곳이라는 마음가짐이 있어서인지 이웃과 인사하지 않게된다. 본가에 돌아오면 경계심이 없던 시절부터 봐왔던, 이젠 몇 남지 않은 이웃 어른들과 눈인사라도 나눈다. 예전엔 큰 덩치에 살짝 기른 장발의 남성미를 보여주셨던 위층 아저씨도 어느새 뒤통수가 보인다는 사실에 문득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익숙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 탁탁탁, 아직도 작년에 하늘나라로 간 오복이가 걸어나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소리를 뒤로하고 달그락 달그락, 분주한 할머니의 소리. 얕은 참기름 냄새와 함께 코를 찌르는 까나리 액젓 내음. 아니나 다를까 손에 고추가루를 잔뜩 뭍힌 할머니는 뭉툭한 손으로오늘도 이름 모를 나물을 주물럭 주물럭거리며 새로 만들었는데 싸갈래? 물어보는 할머니.
"응 좋아요."
출출한 배를 달래러 식탁 위에 미역국을 끓이고 남은 미역으로 튀긴 후 설탕으로 버무려진 할머니의 미역 부각 몇조각을 먼저 입에 넣었다. 몇조각만 먹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5조각을 넘어서 숟가락 까지 가져와 퍼먹고 있는 나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내가 부엌에 들어서자 마자 집게를 지어주며 굽고있는 생선을 뒤집으라는 할머니. 팔팔 끓고있는 커다란 냄비를 열어보니 한솥가득 미역국이다. 농도를 보아하니 오늘 만든 국이다. 이제 이 국은 약 일주일간 줄곧 끓여지며 고기가 입에 넣자마자 흐물해져 녹아내릴만큼 졸아질 예정이다. 냉장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꺼내고, 할머니 혼자 드시는 반찬을 꺼내고 나면 식탁이 어느새 가득차 있다. 밥솥 위엔 '0H'라고 쓰여있다. 뚜껑을 열고 김이 겉히면 갖 지은 밥이 찰기를 띄며 나를 맞이한다.
내 밥을 조금 뜨고 자리에 앉아 먼저 한숟갈 뜬다. 이전에는 할머니와 함께 먹으려 기다리곤 했지만 하루 종일 집에서 바삐 일해온 할머니지만 그사이에도 뭐가 그리 바쁜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할머니 머리 속의 해야할 일들을 하나씩 지워간다. 그 일들은 남의 도움을 받기 원하는 일들이 아니다. 할머니가 원하는 일은 내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따뜻할때 먹는 일 뿐이다. 오늘따라 할머니는 할일이 더 많은 듯 했다. 내 밥이 절반쯤 사라질 무렵 키가 작은 할머니는 다용도실의 깊이가 깊은 세탁기에 거의 들어갈 듯 꼬챙이로 몸에 익은 노하우로 빨래감을 건져낸다. 동생과 내가 나온 집의 빨래감은 꽤나 조촐해졌다.
마치 너가 밥먹고 할 일이 여기 있으니 보라는 듯 마루에 빨래를 무심히 툭 던져 놓고서야 자신의 밥을 뜨는 할머니. 여기서 살짝 밥을 먹는 속도를 늦추면 밥을 다먹고 일어나기 전에 할머니와 몇마디 나눌 시간이 된다. 우리의 대화는 그렇게 살갑거나 정답지만은 않다. 사실 대화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툭툭 내뱉는 질문들에 우리는 서로를 신경쓰고 있다는 마음이 충분히 적셔져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정리하고 할머니가 짜준 행주로 식탁을 닦는다. "카레 남은거 있는데 먹을래?", "딸기 먹을래?", "빵 먹을래?" 저녁을 방금 먹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할머니의 권유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이가 드니 이런 자잘한 챙김이 그리워지곤 하는데, 운좋게도 아직까지 챙김을 받고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이다. 할머니에게 나는 언제나 챙겨줘야할 존재라는 사실이 마음에 안식을 준다. 이 안식을 되도록이면 잔잔히, 오래, 가능하다면 조금씩 나누어서라도 좋으니 이어가고 싶다는 바램 또는 욕심을, 특별하지 않지만 언젠간 특별해질 우리 추억을 잊어버리기 전에 조심스럽게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