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보고 싶은, 글, 풍경, 시간, 사람들

짧은 찰나 스치더라도 무심결에 돌아보게 하는 그런 순간들

by 담백

마음이 텁텁해질 때면 으레 도서관을 찾는다. 책장 사이사이를 찬찬히 걸어보며 지난주에 봣을때도, 지지난주에 봤을때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말없이 꽂혀있는 책들에게 안부를 묻듯 살핀다. 언제고 같은 자리에서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는 것들이 주는 위안이 있다. 눈이 끌리는 대로 시선을 따라가며 책 제목을 훑는다. 자연스레 시선이 멈추는 책을 뽑아 들어 서문을 읽고, 휘리릭 넘기며 신중히 몇 주간을 함께할 책을 고르는 과정, 오롯이 책에 집중하는 그 시간이 나에겐 무척이나 소중하다.


다시 돌아보고 싶은 글들

책을 고를 때 유독 더 신중을 기해서 고르는 이유는 보통 지옥철에서 책을 읽는 편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시간이라도 피할 수 없기에,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알고리즘에 빨려 들어가 시간을 죽이는 편이 편하기때문에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이여야 의식적으로라도 책을 펼치려고 자각할 수 있게하는 메커니즘이랄까. (그럼에도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유혹임은 확실하다.)

때때로 도서관에선 찰떡같이 쫀득해 보였던 책들도 지옥철에선 한 김 식어서인지 푸석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반면에 별 기대가 없던 책에 어느 문장에서부턴가 빨려 들어 몇 장이고 책장을 넘기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는 순간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해 있는 순간들이 있다. 마치 소개팅에서 기대 없이 만난 남자와 얘기만 나눴을 뿐인데 하루가 흘러가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런 신비한 이끌림이 또 다른 책과의 만남을 기대하게 만든다. 또 내 마음을 어떻게 훔쳐봤는지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와닿으면서도 어떻게 같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사를 자아내는 책들. 읽고 또 읽고 밑줄치고 뜯어보게 하는 책들과의 만남도 참 설레는 일이다. 당장이라도 필사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으니 사진을 찍어놓고 나면 잊어버리는 일이 부지기수지만 나도 언젠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상상하며 책을 음미하는 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다.


다시 돌아보고 싶은 사람들

몰두해서 책을 읽다 잠시 덮고 주변을 둘라보는 일을 좋아한다. 책을 읽다 보면 여러 생각과 글감이 떠오르곤 하는데 이렇게 뇌의 과부하가 오려할 때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여러 타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아랑곳 않고 작은 거울을 보며 바쁘게 퍼프를 양볼에 두드리는 사람, 웹툰을 오르내리며 키득이는 사람, 임산부 좌석에 너무나도 버젓이 다리를 벌리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저씨, 아주머니들. 눈살이 찌푸려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행히도 미간의 주름을 펴주는 사람들도 있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앞,뒤, 양옆 사람들을 살피며 최대한 불쾌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 밀치기 달려 나가려고 하기보단 '나갈게요'라고 먼저 말해주는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 너도나도 힘든 상황에서도 자리에 앉아 마땅한 이들에게 빈자리를 내어주는 배려. 최악의 상황에서 사람의 진면모가 보인다고 생각하는 터라 이런 암흑 같은 상황에서 포착되는 작은 배려는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 하구나, 안도하게 한다. 언젠가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된다면 어떨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멀리서 작은 응원을 보내는 따뜻한 순간.


다시 돌아보고 싶은 풍경들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틈에서 얻는 에너지도 좋지만 바람에 따라 살랑이는 나무들, 자연의 백그라운드 사운드만 가득한 곳에서 캠핑의자를 펼치고 다리를 쭉 뻗은 자세로 가장 편안한 사람과 함께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일을 사랑한다. 그곳이 푸르른 나무가 둘러싸인 숲 속일 수도 있고, 하얀 파도가 철썩이는 해변일 수도 있고, 바람에 따라 너울거리는 호숫가일 수도 있다. 그 넓은 공간을 나 혼자 즐기고 있다는 충만감, 나이가 들수록 고요함 속에서 살짝은 지루해지는, 큰 변화가 없는 풍경을 바라보며 멍 때리다 졸리면 잠깐 잠에 드는, 유아시절로 돌아간 듯 본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 늘 촉각을 곤두 세우며 흐름을 파악하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신경 쓰지 않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그런 환경에서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포근함이 마음을 재충전해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게 만든다.


다시 돌아보고 싶은 시간들

다시 돌아보고 싶은 '순간' 보단 '시간'이라는 묘사가 더 좋다. 사진을 찍을 때도 '찰칵'의 순간만을 담는 사진보단 라이브로 짤막한 영상으로 찍는 방식을 선호한다. 최고의 사진을 찍기 위해 100장의 샷을 찍기보단 잘 나오던 못 나오던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한 두 장 찍어두는 편이라 순간을 포착하다 보면 눈을 감고 있다거나 의도한 느낌이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일상에서 힘이 들 때 두고두고 앨범을 돌아보는 편이라 라이브로 남겨두면 그날의 소리, 감정, 변화가 한층 더 생생히 담겨 마치 그날로 돌아간 듯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어느날 사진첩을 돌아보다 은연중에 '특별한' 순간만을 찍는 습관이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부턴 하나라도 작은 행복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그날 먹은 집밥, 가족 모두가 함께한 순간, 그날 읽은 책의 좋은 글귀, 수건을 개는 남편의 뒷모습, 선풍기를 틀고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할머니의 모습, 별거 아니지만 또다시는 없을 순간들. 일기를 쓸 때도 그렇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는 없다. 흘러가 버리면 흐려질 뿐.


작가의 이전글특별하지 않아도 기억하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