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사일 3호
작심사일은 정이와 반이가 한 개 주제를 사일 동안 도전하고 그 사일간의 기록을 담는 뉴스레터 콘텐츠입니다. 구독 가능한 링크는 콘텐츠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Day 0 왜 무진기행?
반이는 사일 동안 필사할 책으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을 선택했다. 한국 문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책이 무진기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이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의 문학 독자들은 김승옥 작가 문장을 최고로 꼽는다. 반이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소설을 써보고 싶다. 대문호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마음으로 사일 동안 옮겨 적고자 한다. 사일 뒤에는 뭔가 대단한 문학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반이는 이 소설이 비교적 짧은 분량일 줄 알았다.)
필사는 자기가 가진 목적에 따라 그에 맞는 텍스트를 선정하면 된다. 구독자님이 소설이 가진 아름다운 문장에 흥미 없다면 독자로만 남으면 된다. 무진기행을 필사할 필요는 없다. 만약 논술을 잘 쓰고 싶다면 기사를 옮겨 적어도 좋고, 자소서를 잘 쓰고 싶다면 훌륭한 비문학 문장을 필사하면서 탐구해도 좋다. 구독자님만의 힐링 시간을 갖기 위해서 좋아하는 시구절을 옮겨 적어도 좋다.
그게 무엇이든, 옮겨 적는 동안엔 무언가가 구독자님 내면에서 태동할 거라고 믿는다.
Day 1. 3페이지
무진기행은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고, 반이는 그 글자를 전부 적은 뒤 곧바로 이번 주 첼린지 주제를 후회했다. 반이는 똥손이라 글자를 적는 게 오래 걸린다. 그 짧은 문장도 꾹꾹 눌러쓰다 보니 몇 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아주 긴 싸움이 될 것 같다. 글씨도 마음에 안 든다. 물론 유난히 오늘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다. 반이는 역사적으로 예쁘게 글씨를 적었던 적이 없다. 다만 글자를 오랫동안 안 적어서 그런지 자필 글씨가 유독 낯설었다.
아마 필기도구 탓도 있을 거다. 당연히도 좋아하는 필기도구를 사용해야 조금이라도 쓸 맛이 생긴다. 반이는 샤프와 모나미 볼펜으로 적었다. 대략 2시간 정도 적었고, 3페이지 정도를 옮겼다. 손이 뻐근했다.
구독자님은 글자를 자주 적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이 발달한 시대에서 활자를 수기로 적을 리가 없어요. 글자를 오랜만에 적다 보면 생각 보다 많은 공구가 필요합니다. 왜 “공부왕찐천재”에서도 홍진경 씨가 공부하기 전에 모닝글로리부터 찾는 것처럼요. 예쁜 공책, 다양한 색의 볼펜, 화이트 등등. 본격적으로 필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류를 미리 구비해두면 좋아요.
어디에 좋냐면, 특히 기분에 좋습니다.
Day 2. 2페이지
1시간 30분을 적었다. 2페이지 분량이다. 반이가 가진 무진기행은 민음사에서 출판한 것으로 32P 분량이다. 지금 이 속도로 가다간 한달을 다 써야 온전히 이 책을 옮겨 적을 것 같다. 하지만 완주는 작심사일 첼린지의 지향점과 맞지 않는다. 애초에 작심사일은 꼭 해보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일을 어떻게든 “시작”하는데 의미를 둔다. 그런 점에서 반이는 4일이 지나고도 이 첼린지를 계속 진행할 것 같다. 무진기행 필사 완주하기. 아마 몇 달이 걸릴 수도 있겠다.
멍 때리면서 글자를 적다보면 어느 순간 무아지경 상태가 된다. 점심에 먹었던 카레를 생각하면서 글자를 옮겨 적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이렇게 적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힘이 덜 들어간 문장에, 풍경 묘사에, 감정 표현에 깜짝 깜짝 놀라게 된다. 무진에 대한 묘사가 그 중 하나였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라는 문장을 옮겨 적은 뒤 가본 적도 없는 무진을 방문하는 기분을 받았다.
그냥 단순히 읽을 땐 놓쳤던 많은 것들을 옮겨 적는 동안 깊게 살펴보게 됐다.
필사에는 전부를 옮겨 적는 통 필사와 부분 필사가 있다. 사실 반이는 필사라면 통 필사만 있는 건 줄 알았다. 그러던 중 감명 깊은 것만 따로 옮겨 적는 부분 필사를 알게 됐다. 서운하지만 이미 늦었다. 구독자님은 부분 필사에 대해 알았으니, 시작할 때 옵션으로 고려하면 된다.
Day 3. 0페이지
야근을 했다. 밤 10시 근처로 집에 도착해서 꾸역꾸역 펜을 들었다. 그리곤 다시 내려놓았다. 도저히 옮겨 적을 열정이 없었다. 눈으로 내가 옮겨 적었던 글을 다시 읽었다. 적는 건 몇 시간이 걸렸는 데, 읽는 데는 몇 분이 안 걸렸다. 소설을 쓴다는 건 물리적으로 글자를 적는 일은 아닐 거다. 작가가 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공들였을까 가늠해 봤다.
장인 정신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에게선 어떤 위엄이 느껴진다. 김승옥 작가는 언어 장인 같았다. 단순히 옮겨 적기만 해도 장인이 만든 창작물을 깊이 경험할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Day 4. 2페이지
어차피 전체를 옮겨 적는 건 진작 물 건너갔다. 편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즐겼다. 좋아하는 노래도 틀고 편한 자세로 문장을 옮겨 적었다. 아직 소설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기도 전이었다. 최종 결과는 8페이지 정도 분량이다. "밤에 만난 사람들"부분에서 끝났다. 총 1/4 정도를 옮겨 적었다. 차마 글씨가 흉해서 텍스트 사진은 공유하지 못한다.
4일간 필사를 하면서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다. 언어에 예민한 사람은 생각에 예민한 사람이고,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반이는 4일간 무진기행을 옮겨 적으면서 매일 사용하는 언어에 많은 관심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게 무진기행 속 담겨 있는 모든 문장이 예술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김승옥 작가는 어떤 언어를 통해 사고하는지 궁금하고, 부러워졌다.
또한 사일 간 작가와 아주 깊은 교감을 나눈 기분이 든다. 필사는 분명 독자와 작가가 가장 짙은 스킨십이 가능한 작업임은 분명하다. 구독자님이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꼭 한번 필사를 추천한다. 그 작가가 더 좋아질 거다.
이렇게 하면 잘 된다.
1. 구독자님이 좋아하는 문구를 미리 갖춰두자. 좋아하는 볼펜이 없다고 필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는 필기구가 있다면 더 즐겁게 할 수 있다.
2. 필사하는 목적에 맞춰서 텍스트와 방법을 선정하자. 필사하는 사람이 100명이면 필사하는 방법도 100가지다.
3. 통 필사와 부분 필사를 구분하자. 생각보다 통 필사는 어렵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1. 무리한 목표를 잡지 말자. 우리는 생각보다 느리게 적는다. 하루에 최대한 많은 문장을 옮겨 적겠다고 무리한 계획을 만들었다간 쉽게 지친다.
2. 관심 없는 주제로 텍스트를 선정하지 말자. 안 그래도 옮겨 적는 거 어려운데, 이왕이면 좋아하는 작품으로 선정해야 꾸준히 적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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