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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타의 보호 아래(4)

by 주이슬 Mar 18. 2025

숲의 손가락에 살짝 입을 맞춘 아이는 곧장 마을로 달려갔어요. 가장 먼저 집으로 들어가 깊은 잠에 빠진 부모님을 천천히 오래 눈에 담았죠. 곧 우물가에서 물을 퍼와 따스하게 데운 뒤, 수건을 적셨답니다. 두 분의 몸이 맑은 물로 정화되길 바라면서요. 그리고 아이는 집 안을 둘러봤답니다. 부모님이 누워있는 자리 중앙에는 흰색 꽃병이 하나 놓여 있었어요. 아이는 빈 꽃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당에 심은 작고 하얀 꽃을 따서 예쁘게 다듬었답니다. 꽃병에 물을 담고, 꽃을 꽂았어요. 부모님이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좋아하는 꽃을 보시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아이는 다시 한번 집 안을 둘러봤어요. 더 이상 할 게 없단 걸 알게 되자, 부모님 뺨에 조용히 입을 맞췄어요.

“사랑해요.”

그리곤 집을 나섰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이는 약속과 달리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참 동안 아이를 기다리던 숲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기지개를 크게 켰어요. 숲에 살고 있던 식물과 동물들이 이에 화답하듯 하품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숲이 몸을 웅크리려던 찰나, 커다란 나무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가 뒤에 숨어 울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눈물이 닿은 자리엔 아이의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하얗고 동글동글한 꽃이 방울지며 피어났어요. 숲은 부드러운 이끼로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죠.

“물빛봉선이로구나.”

아이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숲은 인내심 있게 기다려줬죠. 한참이 지나서 아이는 입을 뗐어요.

“무서워요.”

“쉬이……. 괜찮단다, 아이야.”

숲이 조용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래줬어요.

“제가 겁쟁이라서 실망하셨죠?”

숲은 빙긋 웃었어요.

“아이야. 난 모든 걸 가지고 있지만 딱 한 가지가 부족하단다. 바로 자애로움이지. 네 심장에는 용기가 있어야 할 자리까지 따스함으로 채워져 있어서 그런 거란다. 자애로움이란 건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는 거야.”

“정말인가요?”

“그럼.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자 숲은 다정하게 넝쿨을 열어 주었죠. 아이는 한 걸음, 한 걸음 넝쿨 안으로 걸어 들어가 천천히 숲과 하나가 됐어요. 그러자 넝쿨이 서서히 자라나며 땅까지 길게 끌리는 단단한 꼬리로 변했답니다. 꼬리에는 물빛봉선이 가득 피어나 하얀빛을 방울방울 밝혔어요. 토타라는 이름을 얻게 된 숲은 곧 손을 하늘로 뻗어 별의 부스러기를 가져와 옷을 지어 입었어요. 그러자 온 생물의 지혜를 담고 있던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어요. 종국엔 칠흑 같은 검은빛으로 아름답게 변했답니다.

힘이 생긴 토타는 곧장 작은 마을로 성큼성큼 걸어가 다친 부부의 집에 맑은 숨결을 불어 넣었어요. 그러자 두 사람은 언제 잠들었냐는 듯 개운하게 깨어났죠. 토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길게 자란 넝쿨을 뜯어 마을 사람들에게 꼬리를 하나씩 달아줬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단단한 꼬리로 땅을 지탱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 높이, 멀리 뜀박질을 할 수 있었죠. 마을 사람들은 높이 뛰어오른 다음, 바위를 모운족 머리 위로 힘껏 던지기 시작했어요. 모운족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지만, 꼬리를 가진 날래고 지혜로운 마을 사람들에게 맞서긴 역부족이었답니다. 결국 모운족은 멀리 도망쳤고 마을엔 평화가 찾아왔어요.

마을 사람들은 숲에 감사 인사를 올리며 마을을 지키는 신으로 추앙했어요. 토타신은 아주 오래도록 작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냈어요. 침략자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풍성한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숲의 생명력을 관장했답니다. 그렇게 몇만 년의 시간이 흘렀어요. 토타는 점점 쇠약해졌죠.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는 깊고 긴 잠을 청해야만 했어요. 어느 날, 때가 되었다는 걸 직감한 토타는 마을 주민들을 한자리에 모아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요.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자 경쾌하고 맑은 바람이 눈물을 말려줬어요. 토타의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실려 왔답니다.

“나를 닮아 아름다운 아이들아. 너희가 서로를 소중히 여긴다면 어딜 향하든지 나의 축복과 인내와 사랑을 느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타는 천천히 눈을 감았어요. 사람들은 토타를 기리기 위해 본인들을 스스로 토타족이라고 칭했어요.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토타가 눈을 감은 날을 기념해 숲에 깨끗한 물을 뿌린 다음, 기도를 올리는 의식을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어요. 재단 위에 올라간 물빛봉선은 토타의 보호 아래 단 한 번도 시들지 않은 채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답니다. 


“…끝!”

이야기를 마친 가린이 린델을 바라봤다. 린델은 멍하게 누운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린은 린델의 눈앞에 손바닥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초점이 뚜렷하게 돌아온 린델이 입을 열었다.

“가린, 어떻게 하면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가린은 린델의 뺨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답했다.

“어린 토타처럼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절로 따라올 거야.”

“자애로운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음….”

가린이 짧게 생각을 마치곤, 말을 이었다.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거야. 나를 가엽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가여이 여기고 소중하게 대해주면 돼.”

“어떻게요?”

“딱히 정해진 방법은 없어. 때론 마음을 다한 한마디로 충분할 때도 있고….”

가린은 다시금 린델의 이불을 꼭 여며주며 말했다.

“밤마다 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는 것도, 널 소중하게 대해주는 방법일 수 있지.”

린델은 자신의 뺨에 얹은 가린의 손가락을 살풋 잡았다. 가린이 엄지로 린델의 작고 연약한 손을 살살 쓸었다. 린델은 엄지손가락의 부드러운 움직임에서 ‘자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린델이 가린의 손등에 볼을 부비며 말했다.

“사랑해요.”

가린이 살짝 웃었다. 토타신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응, 그렇게. 나도 사랑해.”

가린은 눈을 감고 자기 전 짧은 기도를 올렸다.

“사랑하는 린델이 자는 동안 보호받길. 토타의 자애로움이 온몸으로 스며들길. 토타의 가르침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그리곤 린델의 이마에 입을 맞춘 다음, 초를 훅 불어 끄고 조용히 방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린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 앞으로 가 섰다. 그리곤 바람솜풀로 엮은 천을 살짝 걷어냈다. 분홍색 달빛이 린델의 납작한 콧대를 물들였다. 마니와 로안의 집이 보였다. 창가에 양초를 올려놨는지 미약한 노란 빛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네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 아름다워서.”라고 말하던 로안의 목소리가 함께 퍼지는 것만 같았다. 린델은 마니의 불룩한 배를 떠올렸다. 곧이어 조용히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수,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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