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타인으로 만나 서로에게 정을 붙이며 산 세월이 어느덧 26년이다. 1999년 12월의 어느 차가웠던 겨울날 시작된 인연이, 이제는 스무 번의 봄을 함께 맞이하는 부부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고도 남을 긴 시간 동안,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참 부지런히도 부딪혔다. 젊은 날의 우리는 치졸하게 승기를 잡으려 애쓰기도 했고, 때로는 날 선 말로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을 적당히 내려놓는 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의 부족함에 화를 내기보다 그 빈틈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우리는 그렇게 두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었다.
아이들에게 온 에너지를 쏟아붓던 시절, 우리는 서로를 향한 애틋함보다는 끈끈한 동지애로 그 고단한 시간을 통과했다. 이제 아이들이 제법 자라 각자의 궤도를 찾아가자, 우리는 거실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 그때 진짜 미쳤었나 봐, 어떻게 그러고 살았지?"라고 말하며 과거를 추억한다. 정말이지 결혼은 미치지 않고서는 감행할 수 없는 인생 최고의 만행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다 남편에게 우리가 왜 결혼했는지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남편은 툭 던지는 말로 내 마음을 몽글하게 만들었다. 그는 "등 긁어주려고 했지"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은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결국 제 손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를 하나씩 품고 산다. 내 눈으로 직접 볼 수도 없고 내 손으로 어찌할 수도 없는 등이라는 부위는 가장 가까운 타인에게만 허락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그 은밀하고 무력한 부위를 가감 없이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곁에 있는 배우자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내 가려움을 읽어내고 투박한 손길로 그곳을 긁어주는 사람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시원한 안식을 얻는다.
시중에는 좋은 효자손이 참 많지만, 그것이 사람의 손만큼 시원할 리 없다. 사람의 손끝에는 미묘한 온기와 적절한 압력, 그리고 상대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내려는 정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손길은 단순한 물리적 자극을 넘어 '내가 당신의 가려움을 알고 있다'는 깊은 위로를 전해준다.
부부의 인연이란 차가운 계산기로는 절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의 연속이다. '네 것'과 '내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그 모호함 속에 '우리'라는 성벽이 더욱 견고해지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결속이 결국 가족과 가정을 완성시킨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흘러가는 삶 속에서, 오늘도 나는 남편에게 기꺼이 등을 내맡긴다. 혼자서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그곳을 그는 가장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다가오는 5월, 우리의 결혼 20주년을 앞두고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인생의 반을 함께 걸어온 이 남자의 투박한 손길이야말로,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수식어보다 나를 가장 평온하게 만드는 사랑의 증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지나온 시간만큼이나 소중한 앞날을 약속한다. 서로의 등을 오래도록 긁어줄 수 있도록, 더 건강을 챙기며 사이좋게 늙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인생의 만행'을 끝까지 아름답게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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