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같이 금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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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3. 2021
잠은 본능이었다. 사람이 극도의 공포와 긴장 속에 놓여 있어도 잠이 들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밖은 이미 밝아져 있었고 오지 않을 것 같던 금요일 아침이 찾아왔다.
일어 나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아이들이 자고 있던 방의 베란다로 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칠흑 같이 어둡던 새벽... 무지막지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지던 그 순간에는 차마 문을 열어 확인 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아침이 되니 베란다의 모습이 창문 안에서도 환히 내다 보였다. 여기저기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 있기는 했지만 그전날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 같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대한 공포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새 벽 부서질 듯 한 천둥과 태울듯한 번개 속에서 방바닥에 흥건히 들어와 있던 빗물은 내게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호텔이 바다 가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도 이틀 전에 강도 6.4의 지진이 있었고 쓰나미 경계경보가 발동되었었다는 것도 내 미칠듯한 상상력에 논리를 얹어 설득력까지 담아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몇 분 간격으로 번쩍번쩍 쿠르르릉 쾅쾅 슈슈 샤샤샤 하는 천둥번개 비바람 세트에 속수무책 벌벌 떨어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바쁘게 재난 영화를 찍어 가며 말이다.
오래된 해운대라는 재난 영화를 하필 이번 여름에 보았다. 장면 장면들이 너무나 생생하고 또렷하게 떠올랐다.
바다에서 도시를 삼킬 것 같은 쓰나미가 몰려오던 그 장면들이 말이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보드라운 바닷바람이 실려 왔다. 저 멀리 보이던 해변가도 그 옆 도로도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마치 내게 뭔 일 있었어?라고 묻는 듯 먹구름 사이사이 천연덕스럽게 고개 내민 파란 하늘에 픽하고 웃음이 터졌다. 아놔 우리 뭐 한 거니? 싶다가도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천둥번개의 피날레를 달리던 그 순간에는 다른 여지는 없었다. 사람이 두려움에 떨다 보니 본색이 슬슬 나오고 액면가 그대로의 모습이 되더라는 거다.
사실 남편에게는 쪽팔려서 말하지 못했다.
나도 모성 충만한 엄마이다 보니 제일 먼저 아이들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아이고 주여! 를 부르짖을 때 우리는 살만큼 살았지만 우리 막내 이제 14살입니다. 딸내미 이제 대학교 2학년이에요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들이에요 라는 기도가 줄줄 나왔다.
그런데 웃기게도 시간이 지나고 천둥번개의 강도가 업그레이드되면서부터는....
살만큼 산 우리에서... 그래도 주여! 이 백세 시대에 우리도 이제 반조금 넘게 살았는데 아직은 아니지 않나요? 시키실 일 좀 더 남지 않았어요? 해가며 주님과 쇼부를 치려고 하더라는 거다.
만약 그 일년치 주여~! 가 몽땅 들어간 기도를 들으셨다면 귀 따가우셨을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을 런지도 모른다.
"자다 염병 허네!”
아침을 먹으러 가기 위해 이번에는 밖으로 난 방문을 열었다. 바닥이 잔뜩 젖어 있었기는 했지만 베란다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베란다 창문 앞에 길게 드러누워 있던 젖은 수건들이 아니었다면 악몽을 꾸었나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천둥번개 속에서도 잘 자고 일어난 막내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고 중간에 우리와 같이 깼던 딸내미는
"어제 진짜 대단했는데.."라고 했다.
그렇지? 이거 진짜 있었던 일이라니까..
늘 그렇듯 산길을 내려갔다가 올라갔다를 몇 번 반복하고 호텔 로비와 우리 방 사이 중간 지점쯤 되던 수영장 앞에 도착했다.
그 천둥번개 비바람에 나무 몇 개는 뽑혀 있거나 테이블 몇 개는 날아가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비치파라솔 몇 개 드러누워 있고 의자 몇 개 뒤집어져 있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와 식당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늘 타고 다니던 엘리베이터에 지금은 작동되지 않는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난리도 아니던 천둥번개와 마구 쏟아지던 비로 전기 시설 중에 한 곳에 이상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렇다니까...
우리는 우리로 5층 정도 되는 건물의 계단을 다시 걸어서 걸어서 내려갔다.
식당으로 올라가는 호텔 로비 복도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에 그리스 크레타 섬으로 들어오는 모든 여행객들은 백신 접종 증명서 코로나 테스트 음성 확인서를 제시해야 한다.
또 우리처럼 아침저녁을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예약하고 온 사람들을 위해 나름의 방역 수칙이 세워져 있었다.
우선 뷔페식당으로 가는 모든 길목뿐만 아니라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마스크 착용과 손 소독은 기본이고 식당 안으로 제한된 숫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밥때가 되면 식당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고는 했다.
매니저로 보이는 아저씨가 항상 식당 입구에서 사람들을 확인하고 한 팀 나가면 한 팀 들여보내고 하는 식으로 식당 내 숫자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일어나면 그 자리를 직원들이 소독제로 식탁뿐만 아니라 의자까지 소독을 끝낸다.
또 식사를 가지러 오가는 모든 시간들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일회용 장갑도 껴야 한다.
뷔페 음식들을 가지러 가는 입구에 일회용 장갑이 늘 비치되어 있었고 직원들이 항상 장갑 사용을 안내 또는 감시했다.
뷔페 접시, 그리고 음식을 뜨거나 집을 때 사용할 집기 등에 개인의 손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생각보다 훨씬 철저하게 방역 수칙 이 지켜지고 있어서 식사하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걸리 더러라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밖에 복도에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어도 식당 안은 언제나 이렇게 자리들을 비워 놓고 있었다. 
마스크와 일회용 장갑 은 음식을 담오 오기 위한 필수 용품이 되어 있었다. 
그전날의 난리부르스로 당분이 필요했던 우리는 그날 아침은 모두 달달한 것들 위주로 먹었다.
호텔 조식에서는 매일 그 자리에서 구워 주는 오믈렛과 팬케이크 그리고 와플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와플은 진짜 맛났다. 요샛말로 겉바속초 라고 나 할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 했다.
아침을 먹으며 우리는 금요일은 아기오스 니콜라오스에서 보내기로 했다.
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매일이 특별했다.
화요일에 지진을 겪고 수요일에는 산토리니 가다 뱃머리로 환장할 지경이었으며 목요일인 그전날은 아침부터 비 맞으며 스피나롱가 섬에 배 타고 다녀오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천둥번개로 대환장의 정점을 찍었으니 식구대로 지쳐 있었다.
에너지 충전이 필요했다. 하루하루가 소중해서 빼곡하게 계획을 세워 어딘가를 찾아다녔던 이전의 여행에 비해 이번 여행은 찾아다닌 것도 많지 않은데 하루도 빤한 날이 없었다.
가족 여행 이 끝나갈 때쯤이면 늘 아쉬운 마음에 하루만 더 있었으면 했던 다른 여행에 비해 이번엔 이제 이틀 남았다.
이틀이 지나면 무사히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다른 여행과 가장 큰 다른 점이었다 하겠다.
아침을 먹고 난 우리는 아기오스 니콜라오스 시내를 향해 가기 위해 천천히 길을 나섰다.
보이시나요? 제 뒤로 보이는 저 하얀 건물의 바다 카페에서 지진을 만났었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