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녹차밭에서 얼떨결에 뱀과 미팅을 하고 오설록 뒤편으로 걸어 올라갔다.
인터넷 검색에서는 머지않은 곳에 이니스프리 하우스라는 곳이 있다 했다.
그곳에서는 녹차가 함유된 화장품 등도 구경할 수 있고 비누 만들기, 엽서 만들기 등의
체험 학습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페에 자리가 넓다고 했다
진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보였다.
카페는 마치 작은 식물원 같기도 하고 정원 같기도 한 카페는 안에도 밖에도 앉을자리가 비어
있었다
9월 말인데 아직도 30도 가까이 올라간 날씨 덕분에 고향의 여름 끝자락을 만날 수 있었지만
더웠다 그리고 목이 말랐다.
뱀을 조우한 덕분에 긴장을 한 탓인지 빨리 뭔가를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역시나 먹는 것에 진심인 나는 긴 줄에 서서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알록달록한 음료 들과 기발한 간식들 구경이 솔솔 해 기다림이 지루 하지 않았다.
화산을 닮은 녹차 들어간 케이크도 재밌지만 해녀의 바구니 라니 말이다.
점심을 먹고 온 게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혼자 앉아 해녀의 바구니 들고 브런치를
할 뻔했지 뭔가.
나는 어쩐지 귤밭에 온 느낌이 들 것 같은 음료를 한잔과 약과를 닮은
간식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왠지 더워도 밖의 청정한 공기를 쐬고 햇빛을 받으며 마시면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페의 발코니처럼 생긴 곳 아래쪽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녹차밭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들이 말하던 녹차밭은 바로 여기였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뱀을 만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게다 (전편 참조)
녹차밭은 흡사 포토존이 되어 사람 반 초록이 반이었다.
초록의 녹차잎들 사이에 선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포즈로 연신 인증사진 찍기 바빴다
엄마와 딸들로 보이는 똑 닮은 가족, 친구들 무리로 보이는 보기만 해도 싱그러운 젊은 청춘들,
외국어라 뭐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들끼리 신난 외국 청년들,
특이한 포즈로 깔깔 거리며 즐거운 순간을 담고 있었다.
스쳐지나 간 사람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녹차밭에서 들려오던
즐거운 웃음과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 푸르름을 배경 삼아 사진 촬영 중인 사람들을 구경하다
문득 테이블 맨 끝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종이 책에 관심을 갖고
있어 아마도 야외에서 책을 손에 든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여름이 다 지나가지 않았던 그때는 종이 책장을 넘기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파란 하늘의 솜사탕 같은 하얀 구름이 뭉실하게 펼쳐진 하늘 아래
초록의 녹차밭을 배경 삼아
나무로 된 긴 테이블 끝에 마주 앉은 남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이 저절로 눈에 담겼다.
햇빛 가득 받은 조금은 더운 오후 긴 우드 테이블 끝에 책장을 사락사락
넘기던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책을 읽었고
간간히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맞은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남자분을 향해
연두부 같은 미소를 머금던 여자분이
"충분해?"라고 딱 한 만디 했다.
왜 그 말이 그리도 울림 있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마치 책 읽기는 이것으로 충분해?라는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함이 이것으로 충분해?라고
묻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 같은 모습을 뒤로하고 그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나는 손에 책 대신 간식이 잔뜩 담긴 쟁반을 들고
굳이 그 자리에 가서 앉아 보았다.
그들처럼 우아한 분위기로 간식이라도 먹어 보기 위함 이였다.
그 순간 깊게 파인 나무 테이블 사이로 어디선가 커다란 풀벌레 한 마리가 폴짝
하고 뛰어올랐다.
나도 모르게 우억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된쟝! 분위기는 아무나 내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