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후쿠다 시게오 | 옮긴이 / 모모세 히로유키, 이지은
후쿠다 시게오의 디자인 재유기
2011년 9월 9일 초판 인쇄
2011년 9월 27일 초판 발행
지은이 후쿠다 시게오
옮긴이 모모세 히로유키, 이지은
펴낸곳 (주)안그라픽스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파주출판도시 회동길 125-12)
- 후쿠다 시게오는 일본 디자인계에 지속적으로 ‘놀이’라는 영향을 미쳐 왔다. 그는 보는 시점을 이동키시거나 고정시킴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 보이게 되는 것을 생각했다. 기발한 발상으로 기존 양식과 개념을 타파해 역전의 발상, 기존의 상식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시 보고, 고쳐 생각하고, 그리고 스스로 뛰어들었다. [14p]
- 컴퓨터가 등장하고 디자인 작업이 한층 편리해진 시대가 도래했다 하더라도 도구는 그저 도구일 뿐이라고, 후쿠다 시게오는 말한다.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는 기량은 각자의 감성과 매일매일 반복하는 훈련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16p]
-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어이없는 해결책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긍정적 해결책으로 받아들인 박람회 주최자 측도 대단했고 이처럼 기막힌 아이디어를 찾아낸 후쿠다 시게오도 대단했다. [21p]
- 후쿠다 시게오의 작품 주제는 형태보다 내용이다. 그의 작품을 특징 짓는 것은 어떤 종류의 테크닉이 아니다. 강렬한 아이디어다. 즉 간략하고 자연스럽고 명확한 아이디어다.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손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 머리로 만들어졌다. [25~26p]
- 후쿠다 시게오의 작업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다. 작품이 유쾌해서인지 고민한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고뇌가 없다는 것은 무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그가 얼마나 자연체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라 하겠다. 후쿠다 시게오의 모든 작품에는 일조일석의 명쾌함이 있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다. [36p]
본문
-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아이디어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생각, 착상, 고안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착상이란 무엇이고, 고안이란 무엇일까?
착상하거나 고안하기 전에는 ‘발견’이라는 중요한 행위가 있다. 발견하는 마음과 의지가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상식을 뛰어 넘어 해결 방법으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 간단히 수간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은 뛰어난 ‘기량’이라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기량’은 누구나 간단히 몸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다. [57p]
- 시각적 상식을 완전히 배신한 조형적 계략,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각 기관의 형태지각 반응을 역이용한 창작 그림이 ‘트릭아트’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시각적인 영상 지식과 육체적인 시각의 한계에 다다르는 교차점에 존재하는 시각적 착각을 유도하는 조형이다. 한 장의 ‘트릭아트’는 보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보이기 때문에 ‘애매한 도형’ 다의도형‘이라 불리며, 심리학에서는 두 가지 다른 상을 연결하는 도형이 많아 보통 ’양의도형‘이라 불린다. [62~63p]
- 실루엣은 기본적으로 실물에 빛을 투사했을 때 생기는 그림자를 생각할 수 있지만, 보다 다양한 실루엣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흰 바탕에 검은 실루엣 또는 검은 바탕에 흰 실루엣으로, 즉 두 개의 면이라는 최소한의 단순함에서 비롯된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66p]
- 실루엣이 그래픽 디자인의 요소로 사용되는 이유는 실상이 가지는 이면성에 있다. 거기에는 확실한 표현 속에 잠재하는 오히려 불확실한 긴장감과 형태가 가지는 비밀스러운 느낌이 존재한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림자의 실상을 상상하게 하고, 그 숨은 계략을 느끼게 하며,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일순간 잊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이 거기에 존재한다. [66p]
- 이러한 견해는 검은 옷을 입고 보조자 역할을 하는 가부키의 구로코 존재와 연결된다. ‘보이지만 보지 않는다’는 감각이다. [69p]
- 그림자가 그 물체의 형태를 투영한다는 원리를 생각하면, 그림자를 통해 그 물체의 정확한 형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고층건물에서 거리를 걷는 보행자를 내려다보면 각기 다른 형태로 보인다. 보행자의 그림자에 따라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포즈나 스타일을, 움직이는 물체를 졸졸 따라다니는 실루엣을 만날 수 있다.
빛의 변화에 따라 보행자의 그림자도 인간의 형태에서 벗어나 추상 형태가 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림자는 우리들의 시각적 상식을 넘어 이해할 수 없는 실루엣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렇게 진실과 만들어진 허상의 허무함이 겹쳐지면서 집요하게 우리를 항상 따라다닌다. [82p]
- 인간의 시각은 어떤 조건에 따라서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다. 또 당연히 보여야 할 것을 전혀 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시지각은 사람의 의지나 상관없이 착시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의 시각적 특징이나 한계를 생각해 보면 이처럼 불안한 세계도 없다. 착시는 미지수지만, 디자인의 중요한 소재다. [93p]
- 악수에는 인간 예찬을 기반으로 한 상호신뢰라는 편안함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무너지면 숨겨진 다른 내용의 드라마가 시작된다. 신뢰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악수 상대가 이익을 쫓아 위협적으로 돌변해도 악수하는 손의 형태는 여전히 인간 예찬의 껍데기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악수라는 의미 속에서 가장 강렬한 시각요소가 된다. [100p]
- 각국은 역사도 생활 문화도 다르다. 그런데 요즘은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서울에서도, 타이페이에서도, 도쿄에서도 반질반질한 컴퓨터만 사용한다. [p102]
- 인간의 작은 세포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과학의 눈이 있다 해도 우리들의 눈은 여전히 불완전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보여 주고, 매력적으로 느끼는 조형은 결국 사람이 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104p]
- "내 대신 미술 공부를 열심히 해 주지 않겠어요? 이 책을 모두 후쿠다 군에게 줄께요.“라고 주인이 말했다. [121p]
- 생각해 보면, 일본은 생활을 즐긴다는 개념이 참 약하다. 일하기 위해서 조금 휴식을 취할 뿐이다. [139p]
-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노는 것, 즐기는 것을 천국으로 여긴다. 일은 이른바 필요악이다. 사실은 일하지 않고 천사에게 둘러싸여 있기를 바라고, 놀기 위해서 일한다. [142p]
- 디자이너는 현대판 닌자가 아닐까? 이기기 위해서 최상의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때로는 비겁함도 감수한다. 놀랄 만한 일도 서슴치 않는다. 천장 속에도 숨는다. 결코 남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것이 디자이너다. [143p]
- 우리는 컴퓨터 시대, IT시대를 살고 있지요.
생각해 보면 컴퓨터는 조수 혹은 어이스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시스턴트를 잘 다루는 디자이너들도 많습니다. 또 만능 어시스턴트를 잘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먹색 하나로 그리는 수묵화가 있습니다. 매화를 그릴 때 어떤 가지에 꽃을 피울까, 봉오리를 어디에 그릴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붓을 듭니다. 수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컴퓨터 작업은 몇 번이고 지울 수 있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행위가 작업 뒤로 미루어질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됩니다. 내 작업실은 나만의 성입니다. 조수도 어시스턴트도 없고, 바쁜 일상 중에 이메일이나 인터넷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질 못합니다. 매일 하얀 종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206p]
- 재미있는 사실은, 여지껏 열 개의 광고를 만들어 온 기업이 시대가 시대인지라 광고를 세 개로 줄이고, 그 세 개의 광고로 어떻게든 과거 열 개와 같은 효과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점점 더 사고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그래서 나는 데이터가 아니라 맥을 짚어 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읽어 내고 광고주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료카드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 책임자의 살아 있는 혈을 파악해야 한다. 더욱 깊이 관여해야 한다. 지금 논해지는 IT, 인터넷은 이런 시대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210~211p]
- 건축가는 처음에는 “그런 거 바로 싫증납니다.”라고 말했지만 실행에 옮겼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종종 사람들이 묻지만, 역시 제대로 놀아 보고 싶었다. [216~217p]
-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중심에는 집이 있다. 이처럼 생활 주변, 집에 대한 디자인을 생각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일본에는 이런 문화가 없다. 회사가 있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비가 오건, 눈이 오건, 정전이건, 전철 회사가 파업을 하건, 하루도 빠짐없이 회사에 가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다. 회사를 중심에 놓고 생활하기 때문에 집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 집안일 따위 부인에게 맡겨 놓으면 그만인 것이다. [217p]
-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워 온 미술 교육은 액자 속에 들어갈 무엇, 미술관에 전시될 무엇인가를 열심히 만드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생활이 즐거워지는지는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미술대학에서 가르치지 않은 것은 일반 대학에서 교육할 리 없다. 그래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218p]
- 일본 디자인 문화를 생각할 때 교육을 넘어서 또 하나 부딪히는 문제가 ‘한길’이다. 무사도, 유도, 화도, 다도 등 어디에든 ‘道’를 뒤에 붙인다. 그 길을 벗어나는 것을 ‘사도’라고 하고, 벗어난 사람을 ‘외도’라고 한다.
닌자로 말하자면 ‘외도’다. 수리검을 던지고, 사라지고, 존경받지 못할 행위를 한다. 눈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서 상대방에게 당당히 이름을 알리는 것이 무사도이기 때문에 멀리서 물건을 던지거나 변신을 하거나 하는 것은 역시 보기에 좋지 못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이나 닌자와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각가라도 돌을 조각하는 사람은 그저 돌만 파고들 뿐 나무를 조각하지는 않는다. 목조 조각을 하는 사람 역시 돌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길을 간다. 하나의 일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것을 일본이라는 나라는 장려해왔다.
그래서 아무리 재능 있는 조각가라 해도 어떤 이는 석조만 고집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데 돌을 조각하는 기간은 몇 달이나 걸리기 때문에 조수를 고용하고 기계를 사용한다. 그래도 소재가 돌이기 때문에 작업이 간단히 진행되지 않는다. 만들고 싶은 것이 많으면 광폭해지기 마련이다. 다른 소재를 사용하면 좋으련만, 도통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219~220p]
- 사전을 찾아보면 ‘백수(노는 사람)’는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거나 도박을 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좋은 이미지가 아니다. 그러나 외국의 ‘플레이보이’는 수입 많고 건강하고 박식하고 교양 있는 사람, 스포츠에 능하고 파티에서도 능수능란한 사람이다. 일본의 대책 없는 백수와는 천지차이다. [221p]
- 언젠가 역 주변에 붙은 포스터가 사라질 수도 있고, 전철 안 광고가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불안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IT산업에도 역시 존재합니다.
미술관에 가서 지킴이가 없다면 고흐의 작품을 손으로 만져 보고 이렇게 그렸구나 하고 느껴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전화상으로 수억짜리 사업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사장들끼리 모여서 최종적으로 악수를 해야 일이 성사됩니다. 그것은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감성적인 부분과 아주 형식적인 부분이 커피 속 하얀 크림의 이중 소용돌이처럼 잘 섞이지 않아서 혼란스러운지 모릅니다. [239p]
- 사람들이 “파칭코는 어떻습니까?”라고 묻습니다만, 파칭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아서 하지 않습니다. 왠지 넋을 빼앗긴 것 같아서 싫더군요. 놀이란 명목으로 유원지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이테크가 아니라 인간의 오감으로 느끼는 즐거움, 사람들이 눈으로 발견하는 즐거움, 그게 좋지 않습니까? [240p]
- 도쿄예술대학에 몸담았던 것은 결국 7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은 교육보다는 그래픽 세계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합니다만, 옳고 그르고를 떠나 대학은 의외로 치외법권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도쿄예술대학에서 건강상의 이유가 아닌 이유로 학교를 떠난 사람은 나 하나라는 사실에 어이없는 웃음이 납니다. [2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