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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혁 Dec 29. 2023

스포츠 캐스터로 10년

돌아보니 벌써 세월이 이렇게

내 직업은 스포츠 캐스터다.


SBS Sports라는 스포츠 전문 방송사에 소속되어 있고,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 중계방송을 진행하는 게 나의 업무다. 지금 주로 담당하는 종목은 야구와 배구다. KBO리그의 한 시즌을 보내면 V리그 시즌이 찾아오고, 그 시즌을 보내면 다시 KBO리그 시즌이 찾아온다. 그 밖에도 당구, 쇼트트랙, 검도, 클라이밍 등이 지금 회사에서 종종 중계하는 종목들이고, 그전에는 축구, 농구, 테니스 등도 맡았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직업이다. 어떤 점이 좋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정말 솔직히 말하면 가장 좋은 점은 스포츠 경기를 돈 안 내고, 그것도 제일 시야가 트인 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거다. 스포츠를  좋아한다면 이게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 알 거다. 경기장에 출근해 중계석에 앉을 때, '이 전망을 보려고 내가 이 일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지금도 이따금 들곤 한다. 


늘 똑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늘 새로운 경기를 본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지루할 틈이 없다. 어떻게 보면 이건 분명 반복적인 업무다. 10년 뒤, 20년 뒤에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면 아마 그때도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진 않을 거다. 똑같이 중계 현장에 나가고, 방송을 하겠지. 그럼에도 오늘의 경기와 내일의 경기는 다르고, 10년 뒤, 20년 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게 된다. 그래서 매번 기대감과 설렘을 갖고 방송을 하러 갈 수 있다. 


그리고 팬들의 기억 속 환희와 감동의 순간에 내 목소리를 함께 남길 수 있다는 것이 이 직업의 가장 큰 낭만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팬에게는 누구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재생되는 명장면이 있고 거기에는 대개 캐스터의 목소리가 같이 담겨 있다. 이를테면, 베이징 올림픽 야구 금메달의 순간을 떠올리면 "오다 정말 직각으로 하나 떨어져 주면 좋은데요..." 하는 한광섭 선생님의 목소리가 자동 플레이 되는 것처럼. 이 일을 하는 동안 나도 그런 순간들을 많이 만들고픈 바람이다. 


나는 커리어를 2014년에 시작했다. 만 스물넷이었고, 아직 대학교 4학년이었다. XTM에서 방송되던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베이스볼 워너B'가 나의 첫 방송 무대였다. XTM은 그 당시 프로야구를 중계하던 CJ 계열 방송 채널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타 방송사에서 중계한 경기 중 하나를 맡아 하이라이트 영상에 더빙을 라이브로 입히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실 아르바이트 개념이었다. 낮에는 학교에 갔고, 저녁에는 가산동의 스튜디오로 출근해 방송을 하고 회당 출연료를 받았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적응하고 할 만했는데, 한 주 한 주 거듭할수록 꽤 힘들었다. 일을 대충 할 수는 없으니 학교 생활에 소홀해졌다. 졸업을 못할 뻔했다. 그럼에도 방송은 너무 재미있었다. 스포츠 캐스터의 길을 본격적으로 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즌이 끝나고 XTM은 더 이상 야구 중계를 하지 않게 되었고, 중계권은 SPOTV로 넘어갔다. 2015년, 나도 중계권을 따라 SPOTV로 옮겼다. 똑같이 한 시즌 동안 하이라이트 더빙을 담당하다가 야구 시즌이 끝난 이후에 정식으로 SPOTV에 입사했다. 그때부터 중계 캐스터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처음 나간 중계는 부천종합운동장이었고 부천FC와 수원FC의 K리그 챌린지(지금의 K리그2) 경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중계를 어떻게 하는 건지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이 갑작스레 투입된 현장이었다. 길눈도 어두운 편인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경기장 중계석까지 어떻게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글을 쓰며 그때 중계 영상을 다시 찾아봤다. 허둥대고 정신없이 떠는 8년 전의 내 목소리가 들린다. 부끄러운 과거도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건 이 직업의 단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그 첫 중계다. 2015년 부천.


어쨌든 다양한 종목의 중계를 담당하며 SPOTV에서 약 7년의 세월을 보냈다. 캐스터로서 스포츠 현장에서 호흡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2022년, 지금의 SBS Sports로 이직해 벌써 거의 2년이 흘렀다. 캐스터로서 조금 정체되어 간다고 느끼던 시기에 새로운 환경을 만난 것도 나에게는 큰 행운이다. 전 직장에서도 KBO리그 중계는 쭉 해왔었기에 이직 후에도 바로 야구 현장에 나가며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흘러 흘러 오다 보니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느덧 캐스터로서 1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대충 세어 보니 그동안 중계한 종목이 대략 30여 가지, 함께 호흡을 맞춘 해설위원이 70명 이상 되는 것 같다. 가끔 내가 예전에 중계했던 영상을 혼자 찾아보기도 하는데, 내가 이런 중계를 했었나 하게 될 때도 종종 있다. 기억이 더 가물가물해지기 전에 지난 시간들을 내 나름대로 글로 남겨보고 싶어 이 브런치를 시작했다. 개인적인 글을 별로 써본 적이 없어 어색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흥미로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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