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8일 잠실야구장
나는 2015년에 SPOTV에 입사했다. 입사 초에는 주로 축구를 중계했다. 지난 글에도 썼듯 K리그 챌린지 경기가 나의 첫 현장 중계였고, 회사에 축구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프리미어리그, 라리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등 각종 해외축구를 맡았다. 그 밖에도 테니스 투어 경기들과 NBA 중계에도 들어갔다.
궁극적으로는 야구 중계를 하고 싶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야구팬이셨다. 대학교 선후배 사이였는데, 야구 얘기를 하다가 가까워지셨다고 한다. 나도 자연스럽게 아주 어릴 때부터 야구 중계를 보며 관심을 가지게 됐다. 예닐곱 살 때쯤부터 일간지 스포츠 면을 스크랩했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가장 먼저 좋아한 스포츠가 야구라고 할 수 있겠다.
야구 중계 기회가 쉽게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다양한 종목을 경험해 보니 야구 중계는 확실히 캐스터의 역량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일단 경기 시간이 비교적 길고, 플레이가 연속적으로 쭉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캐스터가 채워 넣어야 하는 사이사이의 틈도 많다. 어떤 멘트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 나갈 것인가. 캐스터에게 달려 있다. 중계방송에서 캐스터의 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큰 종목이기에 신출내기 함부로 덤벼들기 어렵다.
하지만 생각보다 일찍 야구 중계를 하게 됐다. 직전 시즌까지 야구를 담당하던 캐스터 선배가 2018년 개막을 한 달 정도 남긴 시점에 퇴사를 결정했고, 거기에 SPOTV가 하루 두 경기를 맡게 됐다. 시즌을 앞두고 새로운 캐스터가 필요해졌다. 야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나는 자연스레 후보가 됐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펼쳐지는 KBO 팀들 간의 연습경기가 내 공식적인 첫 야구 중계 무대였다. 현지에 간 건 아니고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받아 하는 오프튜브(off-tube) 중계였다. 꽤 악조건이었다. 일단 현장 중계가 아니면 화면에 나오는 정보만으로 중계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야구 중계는 특히 인플레이 상황에서 타구, 야수, 주자 등을 종합적으로 체크해야 하는데 오프튜브 중계 때는 감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비시즌 연습경기라 따로 출전 엔트리가 정해져 있지 않고, 교체가 많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선수들에 대한 정보를 미리 준비하는 게 제한적이다. 쉽게 말해 잘 모르는 선수가 갑자기 나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거다.
이런 여러 가지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나는 야구 캐스터로서의 역량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일종의 테스트였다. 다행히 베테랑이었던 김재현 해설위원이 나의 파트너로 함께였다. 쩔쩔매는 나를 편하게 이끌어줬다. 솔직히 중계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팬의 입장에서 봐 왔던 야구 중계방송을 어느 정도 흉내 내며 진행했다.
사실은 '흉내'가 핵심이었다. 그전까지 누가 내게 야구 중계를 어떻게 하라고 딱히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가 갑작스러운 야구 중계를 큰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던 건 많은 선배 캐스터들의 중계를 꾸준히 봤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주로 쓰는 표현과 플레이를 풀어 나가는 방식 같은 것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었다. 야구 중계의 공식을 어느 정도 익혀둔 셈이다. 그 덕에 다행히 첫 중계를 큰 실수 없이 마쳤다.
두 번째 중계는 현장이었다. 2018년 3월 18일 잠실야구장. 두산 베어스와 LG 트윈스의 시범경기 중계에 투입됐다.
첫 야구 현장의 기억은 꽤 생생하다. 날씨는 좋았고, 잔디는 파랬고, 중계석에서 보는 그라운드는 드넓었다. 경기 전 양 팀의 대표 선수 인터뷰를 녹화했다. 두산에서는 허경민, LG에서는 채은성(현 한화) 선수였다. TV에서 보던 선수들과 실제로 마주하니 꽤 떨렸다. 오프닝 멘트부터 아주 수없이 연습을 해 갔지만 막상 방송을 시작하니 머리가 새하얬다. '잘하려는 생각은 버리고, 틀리지만 말자' 하는 생각으로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처음에 느낀 가장 큰 어려움은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야구 중계를 할 때 캐스터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일단은 중계석 모니터를 본다. 모니터는 두 대가 놓여 있다. 하나는 클린 모니터, 실시간으로 방송에 나가고 있는 화면이지만 아무런 자막이 입혀지지 않은 상태다. 다른 하나는 온에어 모니터, 여기에는 시청자들이 보는 것과 똑같이 스코어보드와 각종 자막이 입혀져 있지만 경기 실황보다 약 2초 정도가 늦다. 기본적으로는 클린 모니터를 보고, 온에어 모니터에 어떤 자막들이 띄워져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체크한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캐스터가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다. 당연히 현장을 봐야 한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확인하고, 또한 전광판에 나오는 정보들도 틈틈이 눈에 담는다. 타격 후 인플레이 상황이 되면 일단 타구를 보고, 심판의 콜을 보고, 타구를 쫓는 야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주자가 있을 때는 주자의 움직임을 본다. 이 모든 프로세스가 진행된 뒤 캐스터는 어떤 멘트를 할지 결정한다.
당연히 첫 중계 때는 이런 걸 전혀 몰랐기에 흐름을 자꾸 놓쳤다. 역시 베테랑인 민훈기 해설위원이 소위 말하는 '멱살 캐리'를 하며 나를 이끌었다. 운이 좋게도 경기가 평온하게 흘러갔고 3이닝 정도 지난 뒤에야 어떻게 중계를 해 나가야 할지 대충 감을 잡았다. 그 중계까지 무사히 마친 뒤 나는 정식으로 KBO리그 중계에 투입되었다.
위에 쓴 프로세스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게 된 건 거의 한 시즌을 다 치른 뒤였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배움이 많았기에 즐겁게 그 모든 시행착오를 받아들였다. 나는 요즘도 가끔 저 잠실에서의 첫 중계 영상을 찾아보곤 한다. '초심을 찾기 위해' 같은 거창한 이유를 대고 싶진 않지만, 야구 캐스터로서 설레는 첫걸음을 내딛던 나의 모습을 확인하는 건 지금의 내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데 의미 있는 영향을 준다. 목소리도 들떠 있고 표현도 어색한 6년 전의 나에게 잘 해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