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마흔, 경쟁 없는 세상을 기억하다

하루는 무척이나 바쁜데, 왜 바빴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 날.

by 핵추남

아침부터 저녁까지 거래처, 본사 다른 직원들과의 끊임없는 통화, 화상회의 그리고 메신저.

계속해서 이메일을 확인하고 대답하고 필요한 자료를 찾고 그리고 중간에 점심시간은 간단히 샌드위치로,

다시 모르는 내용들을 공부하고 인터넷을 뒤져보고.


지친 심신을 끌고 식탁에 앉아 한숨을 쉬고 대충 간편식으로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면서

요새 코로나 시대 가장 수혜를 받았다는 OTT를 열고 밥 먹으며 볼만한 영화가 없나 추천목록을 뒤적이다

우연히 눈에 띈 영화 '디바'를 틀었다.



딱히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거리가 없고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어는 '경쟁'인 것 같은데

밥을 먹으며 문득

' 아... 경쟁 없는 세상에서 사는 건 진정 불가능한 거냐?'라는 생각이 든다.


'경쟁' 할 필요가 없으면 저렇게 치열하지 않아도 되고,

친구와도 반목 없이 우애 있게 지낼 수 있고

자기 자신을 파멸시키지 않아도 되잖아 (스포주의).


오늘 하루 내가 그렇게 지쳤던 것은 결국엔 모두 '경쟁'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 아니던가.

'자아실현'이니 '보람'이니 하는 것은 그저 허울에 지난 핑계 혹은 나 듣기 좋자고 하는 말 아니던가.

아!! '경쟁' 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그 시절 그곳이 문득 생각이 났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lol


때는 2002년, 온 국민에게서 월드컵의 열기가 아직 떠나지 않은 여름, 장소는 교육의 도시 대전.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EVP (English Village Program), 즉 '영어마을'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영어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약 한 달 넘게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며 마치 영어만 쓰는 마을에서 머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는,

아무튼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그곳에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전국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유학을 가기 위한 박사과정, 카투사를 가기 위해 영어시험 점수가 필요한 학생,

그냥 이유 없이 부모님이 가라고 해서 온 사람, 대학을 입학하고 싶어 온 재수생,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등등.

다 큰 어른들이 '영어'란 목적만으로 인연도 없던 곳에 모여 한 달 넘는 시간을 서로가 좋든 싫든 갇혀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기말 감성



말했듯이 때는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가득하고 장소는 젊음이 넘치는 대학 캠퍼스, 계절은 뜨거운 여름.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모여 '영어'라는 목적으로 왔으니 모두가 모자란 사람이요 그러니 누구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시험도 없으니 1등도 꼴등도 없다. 남들보다 잘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 '경쟁'도 없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스무 살 넘은 성인이 되어 생애 최초로 '경쟁'도 부모나 가족의 '간섭'이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도 없는, 다시는 오지 않을 자유로운 삶을 갖게 된 것이다. 한 달이란 제한된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 시간이 흐르면 다시 보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기에 가식도 필요 없고 그러니 어쩌면 잊었던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쉽게 다시 맛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공부가 될 리가 없고 (물론 나만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어울리는 것이 마냥 좋았다.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끼리 모아 놓으면 처음의 데면데면함은 어디로 가고 곧 잘 친하게 지내지 않은가.

아마 그런 느낌을 기대치도 않게 다 큰 성인이 되어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 때 그 곳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기에 그 순수함을 충실히 느끼면서 지내고자 했던 것같다.

남의 학교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에 참여해서 상금도 타고 그걸 가지고 다 같이 모여 술 먹고. 다음날 수업은 모르겠습니다 하며 지각하고. 아마도 이 모든 게 '경쟁' 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게으름이요 자유로움 아니었을까? 아마 모두가 기대하지도 못한 경험과 느낌이고 다시 '경쟁' 사회로 돌아간 성인의 삶에서는 두 번 다시는 오지 않을 기억이었으리라.


오늘 저녁식사를 하다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억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생각이 나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느낌.

앞으로 죽기 전까지 '경쟁'없는 세상에서 살 수는 없겠지만 그 시절 그곳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순수하게 보낼 수 있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지친 몸과 깊은 한숨을 위로할 수 있으니 나는 너무도 다행이고 행복한 사람이란 생각이 드니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그 사람들. 모두 다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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