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아빠가 된다면
조기현 작가의 '새파란 돌봄'을 보다 보니
처음엔 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보니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 바로 내 지척의 거리에 있는 이야기였다.
당장 나의 여동생은 곧 있으면 아흔이 되는 할머니와 둘이 산다. 글에 나오는 '영케어'가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병환이 깊어 종일 누워있어야 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지근에 누군가가 모니터링을 해야 할 터, 이 또한 '돌봄'이다.
동생이 할머니가 좋아서 함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의 할머니지만 같이 오랜 시간 있기는 쉽지 않기로는 대한민국 탑 클래스다.
내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면서
3대가 함께 살던 정상가족에 금이 갔고
3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던 어머니의 독립을
위해 여동생이 나서서 자신이 같이
할머니와 있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 여동생도 곧 결혼을 하려 하는데
그 결정에 고민을 하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니라
'할머니'란 존재였다.
고모 둘도 사정이 괜찮진 않고 작은 아버지는 지구 반대편으로 간지 오래다. 1세대의 돌봄을 2세대가 온전히 하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3세대에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전가하려는. 이른바 '형제 리스크' 다.
나에겐 씨알도 안 먹힐 일이라 생각했는지 유럽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사촌동생에게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살 것을 권해 본다. 어떻게 꾸며도 어른들의 이기적이고 치사한 행위다.
그렇다고 가정에 방문하는 요양보호사 서비스를 받으려는 할머니가 아니다. 그것이 본인의 자존심에 금이 간다고 생각하나 보다. 스스로가 '늙고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기는 것 같다.
위의 사례에서 국가와 사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왜 '돌봄'을 받는 것이 스스로를 '무기력'하다고 여기게 되는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해도
부모님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빚지고 시작한 결혼생활이지만
그래도 벌이는 젊은 우리가 낫기에
부모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돌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장남과 장녀인 우리에게 있다는 부담감.
그저 부모들이 크게 아프지 않고 조금이라도 경제생활을 해주시면 뭘 주지 않아도 되니 그게 그저 감사한 마음.
누구는 부모에게 조부모에게 뭘 받았다더라 이런 건 TV 속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내 것이 아닌 것.
우리는 10년이 지나도록 집 없이 살고 있는데
최근 부동산이 아주 강세다.
부모에게 아파트를 담보로 빌린 빚이 있어
그 또한 몇 년 전까지는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그 빚 다 털고도 지방에 가면 조그만 집 한 채 살수 있는 상황.
물론 지금 가지고 계신 집을 잘 파신다면 말이다.
나는 갖지도 못하고 이제는 가져볼 꿈도 못 꿀 아파트란 자산이 있는 부모들에 대한 자산이 없는 자식의 '돌봄'의
의무는 어떻게 주어졌나? 하늘이 내린 것인가?
예전엔 백만 원이 아쉬워하더니 왜 지금은 상승장에서 경제적 자유의 기회를 잡지 않고 있어 (나는 가질 수도 없는 기회인데) 또다시 불안감을 전달하는가? 이 불안함은 온전히 '개인'의 것이어야만 하나?
조금 더 가면 친한 동생의 어머니는 치매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번갈아서 돌봐야 한다고 한다.
잠깐 들었던 그 친 구의 일상생활 이야기에 너무도 안타까웠다.
사랑하는 엄마가 자식을 기억하지 못할 때, 그런 엄마와 종일 같이 지내야 할 때. 그 때문에 그 동생은 결혼도 차일피일 미루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것도 아닌데
왜 그들의 돌봄은 '가족' 안에서 해결돼야 할까?
책을 읽다 보니 20년도 더 전에 친구가 생각났다 (20년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오래 같이 지내지는 못했다. 대학교 1학년 그 자유롭던 시기에 교류가 꽤 있었지만 그 친구가 미대라는 특수성에 바빠서인지 어느 순간 연락이 안 되고 멀어져 같다.
그런데 책을 읽다 생각난 그 친구의 한 마디.
' 우리 엄마가 정신병이야. 정신병원에 있다 오셨는데.. 그 병이라는 거. 같이 사는 사람을 정말 너무 지치게 하더라고.'
지금 생각하니 조현병이 아니었을까? 조현병은 100명 중 1명꼴로 나타나는 흔한 질병이라고 한다. 잘 관리하면 일상에 문제도 없고. 2022년이니 이렇게 이야기하지 2001년엔 정신질환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금도 딱히 자유롭진 않은 거 같다)
그때 그 친구에게 책에 나온 것과 같은 이야기를 사회가 해줬어야 했다.
'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야. 네가 그 병을 고칠 수도 없어. 하지만 도울 수는 있어. 그러니 어른들과 사회에 질문도 하고 도움도 요청해. 너와 관계없는 일에 죄책감이나 실패의 부담을 갖지 말고 너의 생활을 계속 유지하거라.'라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 나의 인생작이다.
거기에 나오는 아이유는 할머니를 어릴 때부터 돌본다.
흔히 청소년은 돌봄을 받아야 한다 생각한다.
맞다 그게 권리다.
그런데 현실에선 도리어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에게 어느 누구도 돌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아이유도 '아저씨'를 만나기 전까진 할머니의 돌봄은 온전히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녀는 공부를 좋아했다. 잘했다. 더 잘하고 싶었다.
생명공학을 선택했던 시기는 황우석 박사가 유명했던 (논문 위조 전) 시절이다.
더 공부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고 학사를 마친 후 박사까지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집은 여유가 있지 않았다. IMF 이후 줄곧 가정의 경제를 책임질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대학교 입학 때부터 박사를 졸업할 때까지, 아니 박사후 과정을 마치고 나서까지 아르바이트로 학자금을 갚으며 학업을 유지해야 했다.
그런 그녀가 박사과정을 신청하겠다고 했을 때, 아마 그들은 지금 기억도 못 하겠지만 그녀의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빨리 학사 마치고 취업해서 돈 벌어오기를 바랐었는데..'
'돈을 벌어 온다' 라니. 머리가 뛰어나 유명한 대학에 들어간 딸은 그 집에서 고작 필요한 돈을 벌어오기 위해 취업을 했어야만 한다는 건가? 저 말이 그녀의 가슴에 잊지 못할 생체기를 냈고 어떻게든 빨리 이 집을 떠야지 않으면 자신은 그저 돈만 벌어오는 기계가 될 것 같다는 공포를 가져왔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출산율을 더 떨어지고 있다.
어느 책 제목처럼
언젠가 나도 '아빠의 아빠'가 될지 모르겠다.
그때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나도 욕망이 넘쳐 경쟁을 통한 지위 상승을 꿈꾼다.
그렇지만 그런 지위 상승으로 충분한 부를 축적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시 한번 '연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2022년은 치열한 대선으로 기억될 해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무엇을 선택했을까?